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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낙원’ 믿고 北으로…日와세다대서 드러난 재일동포 북송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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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재 도쿄 특파원

승인 : 2026. 06. 06.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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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됐다 탈출한 양민웅씨, 日 남은 가족 전문자씨 증언 '귀국사업' 아닌 '국가적 사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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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6일 일본 와세다대에서 재일동포 북송사업으로 북송되었다가 탈북한 양민웅(梁敏雄)씨가 북송동포의 실상을 증언하고 있다. /최영재 도쿄 특파원
6일 오후 2시 일본 도쿄 와세다대 도야마캠퍼스 36호관 581강의실. 대형 화면에는 북한 지도가 떠 있었다. 함경북도 회령, 평안남도, 황해북도 같은 지명이 일본어 독음과 함께 표시됐다. 화면 왼쪽에는 한 사람의 이력이 소개됐다. 1945년 일본 이시카와현 가가시에서 태어난 양민웅(梁敏雄)씨. 그는 1960년 6월 17일 부모와 자매와 함께 제26차 귀국선에 올라 북한으로 갔다.

행사장에 모인 150여명의 청중들은 이 이력이 단순한 개인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날 열린 재일북송동포 증언행사는 '귀국사업'이라는 말로 포장돼 온 북송의 실체를 현장의 목소리로 다시 확인하는 자리였다. 북한에 직접 끌려가듯 건너갔다가 훗날 탈출한 사람, 가족을 북한에 보내고 일본에 남은 사람, 그리고 이들을 기록해 온 사회자의 설명이 차례로 이어졌다. 한 사람의 비극이 아니라, 한 시대를 관통한 집단적 사기극의 윤곽이 강의실 안에서 맞춰졌다.

양씨 사례는 북송사업의 본질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줬다. 화면에 소개된 이력에 따르면, 생활고에 시달리던 양씨의 부모에게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는 북한행을 권유했다. 북한은 재일동포들에게 교육·의료·주거·일자리가 보장되는 미래를 약속했다. 일본 내 친북계 재일조선인 조직인 조총련은 이 선전을 현장에서 전달하며 귀국선을 타도록 권유한 핵심 통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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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6일 일본 와세다대서 열린 재일동포 북송사업 증언행사에서 청중들이 북송동포의 실상을 듣고 있다./사진=최영재 도쿄 특파원
자녀 교육이 보장되고, 장차 한반도가 통일되면 고향인 남쪽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양씨의 부친은 귀국을 결심했다. 그렇게 양씨 가족은 일본을 떠났다. 그러나 배가 닿은 곳은 약속된 낙원이 아니었다. 양씨는 함경북도 회령시에 배치됐고, 중학교 편입과 광산고등기술학교 진학을 거쳐 탄광 노동에 종사했다.

△일단 청진항에 도착하면 돌아올 수 없어
'귀국'이라는 말은 여기서 무너진다. 양씨 가족은 북한에 생활 기반이 있어서 돌아간 것이 아니었다. 일본에서 태어난 아이가 조총련의 권유와 부모의 기대 속에 배에 올랐고, 도착한 뒤에는 일본으로 자유롭게 돌아올 수 없는 삶이 시작됐다. 북송사업이 단순한 이주가 아니라 "사기에 의한 납치"에 가까웠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선택은 출항 전까지만 가능했다. 청진항에 닿은 뒤 선택권은 닫혔다.

양씨가 훗날 북한을 빠져나와 자신의 경험을 증언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 자체도, 북송동포 다수가 처한 현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돌아올 수 있는 길이 제도적으로 열려 있었다면 '탈출'이라는 말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북한으로 간 재일동포들은 일본에서 들었던 "교육", "생활 보장", "사회주의 낙원"이라는 말과 전혀 다른 현실을 마주했다. 이동과 직업, 말과 편지, 가족과의 연락까지 통제되는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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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북송사업으로 보내고 생이별을 한 전문자씨가 증언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사진=최영재 도쿄 특파원
전문자씨의 증언은 그 비극의 다른 절반을 보여줬다. 그는 직접 북송된 사람이 아니라, 가족을 북한으로 보내고 일본에 남은 사람이었다. 북송사업은 북송선을 탄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일본에 남은 가족에게도 그것은 평생 끝나지 않는 이별이었다. 북한으로 간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는 통로는 자유로운 왕래가 아니라 드물게 도착하는 편지와 사진뿐이었다.

그 편지들은 '지상낙원'이라는 선전을 정면으로 배반했다. 북한에 간 가족들은 일본에 남은 친족에게 약품과 돈, 생활필수품을 부탁했다고 한다. 풍요로운 사회주의 낙원으로 간 사람들이 왜 일본의 가족에게 약을 보내달라고 해야 했는가. 편지는 안부가 아니라 구조 신호에 가까웠다. 사진은 추억이 아니라, 갇힌 가족이 아직 살아 있음을 알리는 희미한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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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자씨는 평생을 북송된 가족의 귀환을 위해 운동을 벌였다./사진=최영재 도쿄 특파원
△일본 정부와 사회의 책임
전문자씨의 말이 보여준 것은 일본에 남은 가족의 죄책감과 무력감이었다. 가족을 보냈지만 데려올 수 없었다. 편지를 받아도 달려갈 수 없었다. 물건을 보내며 버티게 할 수는 있었지만, 삶을 바꿔줄 수는 없었다. 북송사업의 폭력성은 바로 이 지점에 있었다. 사람을 배에 태운 뒤 국경 너머에 가둔 것만이 아니었다. 남은 가족에게도 수십 년 동안 "보내기만 하고 구해내지 못했다"는 시간을 견디게 했다.

사회자는 이날 증언을 개인사의 차원에 가두지 않았다. 그는 북송사업이 왜 오랫동안 '귀국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지, 그 말이 어떻게 피해의 본질을 흐려왔는지를 설명했다. 북한은 재일동포들에게 교육·의료·주거·일자리가 보장되는 미래를 약속했다. 조총련은 일본 안에서 그 선전을 조직적으로 전달했다. 일본 사회는 이를 인도주의적 귀환처럼 받아들였다. 그러나 결과는 돌아올 수 없는 이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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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된 재일동포 가족들의 사진/사진은 이시마루 지로 아시아프레스 대표의 프리젠테이션을 촬영
사회자의 설명에서 특히 무거웠던 대목은 일본 정부와 일본 사회의 책임이었다. 북송사업은 북한 정권과 조총련만으로 성립한 일이 아니었다. 전후 일본에서 재일동포는 차별과 빈곤 속에 놓여 있었다. 일본 정부는 이들을 일본 사회의 구성원으로 끌어안기보다, 북한으로 보내는 흐름을 사실상 방치했다. '귀국'이라는 이름은 북한에는 체제 선전이었고, 일본에는 불편한 소수자를 밖으로 밀어내는 편리한 언어가 됐다.

재일동포 북송사업은 1959년 시작돼 1984년까지 이어졌다. 9만명이 넘는 재일동포와 일본인 가족들이 북한으로 건너갔다. 이 가운데는 북한에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재일 2세, 일본인 배우자, 어린 자녀들도 있었다. 그들에게 북한행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었다. 많은 경우 그것은 거짓 정보와 조직적 권유 속에서 시작된, 돌아올 수 없는 항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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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된 재일동포 가족을이 일본에 남은 가족들에게 보내온 편지 /사진은 이시마루 지로 아시아프레스 대표의 프리젠테이션을 퐐영
와세다대 증언행사는 재일동포 북송사업이 '귀국'이 아니라 허위 선전과 방치가 낳은 인권 문제였음을 보여줬다. 여기에는 △북한의 선전, △조총련의 동원, △일본 정부의 방치라는 삼각구조가 있었다. 참석자들은 재일동포 북송사업은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라 국가집단이 저지른 거대한 사기극이고 인권침해라고 증언하고 있었다.
최영재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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