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클레스’에서 ‘리어왕’까지, 무대 위에서 길어 올린 시간의 리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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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연기가 시작되자 객석의 공기가 달라졌다. 거친 폭풍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그의 움직임에서 단순한 연기가 아니라 '살아 있는 바다'를 본 듯했다. 대사보다 먼저 눈이 갔고, 조명보다 먼저 그의 몸이 공간을 흔들었다. 감정이 아니라 파도의 리듬 그 자체가 배우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순간이었다. 거대한 무대의 파도가 잠잠해질 때쯤, 관객의 시선 속에는 이미 '인물의 숨결을 직접 구현하는 배우' 김현균이 남았다. 단순히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아니라, 무대를 자신의 생명처럼 호흡하는 배우였다.
"그 장면이 아직도 기억나요. 온몸으로 바다를 연기해야 했거든요. 그 순간 나와 무대가 하나가 된 느낌이었어요. '이게 내 세계구나, 무대가 나랑 같이 움직이는구나' 하는 확신이 그때 처음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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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제 뿌리고, 드라마와 영화는 또 다른 호흡이에요. 장르는 달라도 결국 진심으로 연결돼 있습니다. 어떤 무대에서든 인물을 진심으로 대해야 한다는 건 같아요." 그의 목소리는 단단했지만, 여운이 길었다. 배우로서의 시간과 인간으로서의 시간이 분리되지 않는 사람, 그는 그렇게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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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클레스'의 무대는 이미 단단했던 그의 연기 세계를 한층 더 깊게 보여준 순간이었다. 셰익스피어의 후기 대작으로, 신구·최용민·정한용·이근희·윤동환·유태웅 등 내로라하는 중견 배우들이 함께한 무대였다. 특히 신구 배우와의 호흡은 특별했다. 무대 위에서 그는 신구라는 거대한 에너지를 마주하며, 한 장면의 밀도를 견디는 법을 배웠다.
"그분들과 같은 무대에 선다는 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 무게가 오히려 무대의 중심을 잡는 법을 가르쳐줬습니다. 함께 호흡할수록 '존재의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했죠. 제 캐릭터의 디테일 하나가 상대배우의 리듬과 장면 전체의 밀도를 바꾼다는 걸 그때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배우들의 감정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가운데, 김현균의 몸짓은 일정한 파동으로 균형을 잡고 있었다. 그는 감정의 파도 위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배우였다. 조명 아래에서 그의 눈빛은 물결처럼 흔들렸고, 그 흔들림이 곧 인물의 리듬이었다. 김현균은 인물을 이해할 때 감정을 먼저 꺼내지 않는다. 대신 인물의 몸짓과 호흡, 그리고 말의 여백에서 마음의 방향을 찾는다.
"감정은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저절로 생기는 거예요. 제가 하는 일은 캐릭터의 목적을 잃지 않는 것에 집중하는 것뿐입니다."
그의 연기는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감정이 잠복해 있는 상태의 긴장으로 완성된다. '보이겟츠걸'과 '베드룸파스'에서도 그는 대사보다 시선의 온도로 관계를 조율했다. 말하지 않아도 인물 사이의 공기가 흔들렸고, 그 정적이 장면의 리듬을 만들었다. "관계의 긴장감은 말보다 눈빛 사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1초의 여백이 인물의 진심을 드러내요." 기자가 무대에서 본 그의 모습은 늘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긴장과 집중이 교차했다. 그는 소리보다 숨으로 연기하는 배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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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재 배우가 리어로 무너질 때, 김현균의 에드가는 그 무너짐을 끝까지 견뎌낸 인간의 눈이었다. 세대의 무게가 맞닿은 무대에서 그는 관찰자이자 증언자의 자리를 택했고, 단순히 바라보는 것을 넘어 그 몰락의 리듬 속에 몸을 담갔다. "선생님이 대사를 멈추고 눈빛만 주실 때가 있었어요. 그 한순간이 리어왕의 침묵이자, 에드가의 각성이었죠. 그 시선과 순간의 포즈(pause)로 장면 전체가 바뀌었습니다."
연습 과정은 혹독했다. 김현균은 매일 스스로의 체력을 조율하며 감정의 강약을 일정하게 유지했다. "하루하루가 몸의 싸움이었어요. 체중은 줄이고 체력은 키우며, 발성 톤을 맞추며 감정의 균형을 잡았죠. 체력이 부족해 몸이 힘들어지면 감정을 포함한 모든 균형이 무너집니다." 에드가가 광기로 가장하는 장면을 위해 그는 말을 줄였다. "에드가는 미친 척을 하지만 사실은 가장 이성적인 인물이에요. 감정의 밑바닥을 드러내기보다 그 밑에서 진심이 흘러나오게 만들어야 했죠."
무대의 조명이 꺼지는 순간까지 그는 에드가의 리듬을 놓지 않았다. 이순재의 리어가 절망 속으로 사라질 때, 김현균의 에드가는 관객을 향해 남겨진 인간의 존엄을 증언했다. "공연이 끝나도 에드가의 리듬이 몸에 남아 있었어요. 걸음을 옮기거나 숨을 쉴 때마다 여전히 무대의 파동이 들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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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균은 드라마 현장에서도 무대에서 익힌 호흡을 잃지 않았다. "드라마는 감정의 속도가 빠르지만, 중심을 놓치면 인물이 금세 가벼워져요. 그래서 무대처럼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짧은 시간 안에 연습을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그는 장면 전환마다 감독과 리듬을 맞추며 감정의 흐름을 다듬었다. "대사는 편집으로 이어지지만, 호흡은 제 안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그의 연기는 말보다 여백이 더 많은 음악처럼 들렸다. 절제된 시선 안에서도 인간의 미세한 흔들림이 있었다. 무대에서 체득한 정적의 힘이 카메라 앞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었다. 기자의 눈에는 그가 여전히 '무대의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카메라 앞에서도 그는 호흡으로 연기하고, 정적으로 존재했다.
김현균은 연극과 드라마, 그리고 영화까지 오가며 여전히 자신만의 리듬을 탐구하고 있다. "무대는 제 뿌리예요. 드라마와 영화는 또 다른 리듬이죠. 방식은 다르지만 결국 인물을 대하는 진심은 같습니다." 그는 지금도 매일 새벽, 발성과 호흡을 점검하며 몸의 중심을 다잡는다. "무대에서 익힌 호흡은 결국 제 삶의 리듬이에요. 하루를 시작할 때 숨을 고르는 일, 그게 연습이자 제 일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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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무대는 언제나 파도처럼 출렁인다. 감정의 표면은 흔들리지만 그 밑에는 단단한 리듬이 흐른다. 셰익스피어의 시대를 건너 지금의 극장까지 이어진 파도의 호흡. 그것이 김현균이라는 배우의 본질이다. 수많은 배우를 봐왔지만, 김현균의 무대는 여전히 새롭다. 그는 감정의 배우가 아니라, 존재의 배우다. 조명이 꺼지고 객석이 어두워져도 그의 숨결은 남는다. 말보다 호흡이 먼저 흐르고, 빛보다 눈이 먼저 움직인다. 김현균의 연기는 여전히 파도처럼 숨 쉬고 있다. 단 한 번도 같은 호흡으로 숨 쉰 적이 없는 사람, 그가 바로 배우 김현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