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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처음 본 것은 1998년, 극장개봉 당시였다. 기억의 키가 작동하면서, 펑펑 울었던 게 떠올랐다. 트루먼이 풍랑과 싸우다가 배에 몸을 묶고 기절했다가 깨어난 시점에서, 무너졌던 것 같다. 파도가 그치고 잔잔해진 바다 위에 떠 있던 배가 갑자기 벽에 부닥친다. 수평선 멀리 보이던 뭉게구름이 사실은 세트장 외벽의 그림이었다. 어떤 무엇보다도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유난히 반복해서 듣던, 만 서른 살의 어느 날. 짐 캐리 주연이라는 포스터만 믿고, 웃음으로나마 초췌한 마음을 추스르고 싶었다. 그런데 웃음은커녕 눈물로 탈진한 채 크레디트가 끝날 때까지 일어나질 못했다. 낄낄대러 들어갔다가 엉엉대며 나온 꼴이다. 감독이 '죽은 시인의 사회'를 연출한 피터 위어라는 사실은 영화가 끝나고서야 알았다.
울었던 이유는 한마디로 '자기연민'이었다. 한계에 부딪힌 서른 살의 청년이 트루먼에게 이입되어 울었던 것이다. 영화의 끝 장면, 관객은 트루먼과 함께 세상으로 이어진 좁은 문을 나선다. 하지만 그 이후는 어땠을까? 드라마 '오징어 게임' 속처럼 진행요원들이 기거하는 긴 복도를 지나 기계실의 좁은 미로를 헤매지는 않았을까 싶다. 요행히 바깥세상으로 나와, 맡은 배역을 위반하고 트루먼과 눈이 맞았던 로렌(극 중 본명 실비아)과 마침내 조우하고, 그녀와 함께 어디론가 행복을 찾아 떠났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문득 영화 졸업(마이크 니콜스 감독 연출 1967년 작)의 마지막 엔딩처럼 자신이 저지른 무모한 결정의 무게 앞에 선 두 주인공 베자민과 엘레인(더스틴 호프만 & 캐서린 로스 분)이 중첩됐다. 길게 투 샷으로 잡은 '그들의 어색한 표정'이 겹쳤다. 어쨌든 트루먼과 실비아는 지금 잘살고 있을까? 어림잡아 60대 중반이 되었을 테고, 돔에서 탈출한 후 바로 아이가 생겼다면 자식도 20대 후반이 됐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트루먼 쇼가 재소환된 것은 올해 3월에 개최된 51회 세자르 영화상 시상식에서 짐 캐리가 명예 세자르상을 수상하면서다. 프랑스어로 유창하게 수상소감을 말한 그는 어딘가 어색해 보였고, 세간에 대역설이 나돌았다. 소문은 확장돼 짐 캐리는 이미 죽었고, 그를 복제한 클론이 대역을 맡고 있다는 루머까지 나왔다. 그 이후 우리나라에선 마케팅 차원으로 트루먼 쇼가 단기간 재개봉되기도 하였다. 가짜가 진짜를 견인한 모양새다.
그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보다 더 중요한 점은 이제 사람들은 미디어의 이미지를 백 프로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현대사회는 미디어가 생산한 파생 실재(시뮬라크르)로 실재(The Real)가 대체되고 있다. 이와 같은 시뮬라시옹의 세계관을 잘 표현한 작품이 트루먼 쇼다. 그런데 그 배역을 맡은 짐 캐리 또한 또 다른 가짜에 의해 대체되었다고 믿는 음모론이 널리 퍼진 것은 그 자체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실, 28년 만에 풀 버전으로 트루먼 쇼를 다시 보면서 주인공에게 이입하기보다는 다른 배역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트루먼에 열광하고 눈물짓고 감동하는 극 중 시청자들이었다. 브리지 신으로 배치된 단역 캐릭터들은 늘 그 자리에 고정돼 있었다. 어쩌면 트루먼보다도 더 프레임에 갇힌 존재들이다. 스타의 등장에 열광하고 스타가 성장하는 것을 누구보다도 응원하지만, 스타가 퇴장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곧바로 채널을 돌려버린다.
트루먼 쇼가 개봉된 시기는 IMF로 통칭되는 위기의 시대이자 전환의 시대였다. 이후 한세대가 흘렀다. 그 사이 여덟 번이나 대통령이 바뀌었다. 방송 및 영화 연예계에선 영광의 정점에 섰다가 여론 몰이 때문에 극단적 선택을 한 이들의 이름이 여럿 뇌리를 스친다. 트루먼 쇼의 주인공 트루먼은 우리가 어떤 구조에 호명되어 살고 있는지, 그래서 그 틀을 깨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지만 정작 우리는 변한 게 없이 프레임을 더욱 강화했다. 스타의 등퇴장에 편승해 환호하기도 하고 구호를 외치기도 했으며 상실의 아픔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의식을 기반으로 '효과로서 정의감'을 장착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는 이념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공통의 현상이다.
세미나 중에 나온 한 학생의 말에 새삼 부끄러워진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는 것 같아요." 옛날얘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들의 모습 같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는 극 중 시청자 단역 캐릭터와 닮은꼴이다. 그 사이에 우리는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에코 체임버'에 갇혀 있다. 이로써 적대적인 집단에 대한 적의와 분노는 혐오라는 이름의 데이터를 재생산함으로써 가공할 만한 에너지를 소비한다. 확증 편향된 각각의 그룹은 그들이 선호하는 미디어가 재생산한 기사가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돼도 상관치 않는다. 이와 같이 악순환적인 방식으로 소진된 사회적·물리적 에너지를 재장전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데이터교의 에너지 공급원이 되고 있다.
트루먼 쇼가 개봉된 다음 해에 매트릭스가 대중에게 선보였다. 우연이겠지만 그야말로 '징후적'이었다. 현재 우리는 '왜곡된 맞춤형 알고리즘'을 무한 재생산하는 데이터교에 대해 통제를 못 하고 있다. 이제, 앞서 얘기한 '애프터 트루먼 쇼에 대한 상상'은 그저 '낭만적인 상상력'에 불과할 것이다.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암울한 미래는 이미 와 있다. 그것도 널리 퍼져 있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미디어스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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