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40주년을 맞은 유니버설발레단의 '심청'이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올랐다. 한국 창작발레의 살아있는 역사라 불리는 이 작품은 오랜 세월 다듬어진 완성도와 더불어,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예술이라는 점을 입증했다.
2일 공연은 무엇보다 '시간의 축적'이 빚어낸 깊이가 인상적이었다. 잘 알려진 고전 서사를 기반으로 한 만큼 관객의 이해 장벽은 낮았고, 이야기의 익숙함은 오히려 감정 몰입을 빠르게 이끌어냈다.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장면과 부녀의 재회는 여전히 강력한 정서적 파장을 남겼다.
특히 이번 무대에서 눈길을 끈 것은 배우 김명수의 '심봉사'였다. 발레 무대에 처음 도전한 그는 대사 없이 오롯이 몸짓과 표정만으로 인물의 서사를 구축하며, 기존 무용수들과는 결이 다른 밀도의 연기를 선보였다. 과장되지 않은 절제된 움직임 속에서도 부성애와 절망, 그리고 기적의 순간까지를 설득력 있게 담아내며 작품의 드라마를 한층 끌어올렸다. 그의 등장은 단순한 화제성을 넘어, 발레가 확장할 수 있는 표현 영역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이와 함께 '심청' 역의 강미선은 작품의 중심을 단단히 지탱했다. 오랜 시간 이 역할을 맡아온 그는 절제된 테크닉과 깊이 있는 감정 표현으로 인물의 서사를 설득력 있게 완성했다. 인당수에 몸을 던지기 전의 고요한 결단부터, 왕과의 파드되에서 드러나는 섬세한 감정선까지, 무대 위 모든 순간이 축적된 내공으로 빛났다. 특히 이동탁, 이현준,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등과의 호흡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존재감은 40년 레퍼토리의 '현재형 완성도'를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무대 위 또 하나의 반가운 존재는 5세 '심청'으로 등장한 엄로아였다. 발레리나 황혜민과 발레리노 엄재용의 딸인 그는 짧은 등장만으로도 객석의 미소를 자아냈다. 천진한 움직임과 자연스러운 표현은 작품 초반부에 따뜻한 온기를 더하며 관객의 감정을 부드럽게 열어주는 역할을 했다.
유니버설발레단이 40년간 축적해온 군무의 힘 역시 여전히 견고했다. 폭풍우 속 선원들의 군무는 박력과 정교함을 동시에 보여주며 극의 긴장감을 극대화했고, '문라이트 파드되'에서는 절제된 아름다움과 낭만이 균형을 이루며 클래식 발레의 미학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세대를 아우르는 무용수들의 조화는 이 작품이 단순한 레퍼토리를 넘어 '전통'으로 자리 잡았음을 실감하게 했다.
[공연사진] 2026 심청_1막2장 선상(강미선)_ⓒ Universal Bal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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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 '심청' 1막 2장 선상 장면. /유니버설발레단
다만 아쉬움도 분명했다. 용궁 장면의 미장센은 작품 전체의 완성도에 비해 다소 이질적이었다. 화려함을 의도한 의상과 세트는 오히려 시대감각에서 벗어난 인상을 주며, 일부에서는 장면의 몰입을 방해하기도 했다. 환상성과 상징성이 중요한 장면인 만큼, 보다 세련된 디자인과 현대적 감각의 재해석이 더해진다면 작품의 국제 경쟁력은 한층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청'은 여전히 강력한 생명력을 지닌 작품이다. 동서양 미학의 결합, 그리고 '효'라는 보편적 정서를 발레 언어로 풀어낸 이 서사는 국경을 넘어 공감될 수 있는 힘을 지녔다. 40년의 시간은 이 작품을 낡게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단단하게 다듬어왔다.
이날 공연은 과거의 유산을 기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앞으로의 가능성을 동시에 제시했다. 몇 가지 미학적 보완이 더해진다면, '심청'은 명실상부한 세계적 레퍼토리로 도약할 잠재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