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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별 쓸모가 없어 보이는 철학자를 플라톤은 생산자인 농민이나 수공업자 혹은 상인보다 더 높였다. 심지어는 수호자인 전사보다도 더 높이더니 마침내 철학자가 왕이 되어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철인정치론이다.
철학자가 사랑하는 지혜는 긍극적 진리에 대한 앎을 뜻하지만 합리적 사유를 버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철인정치론은 고대 이집트의 신정정치론과는 다른 상당히 합리적인 주장이었다. 또한 그것은 전사가 지배층이 되고 왕이 되었던 고대국가의 상무적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혁명적인 주장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잘난체하기 위해 혹은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지지고 볶는데 철학자가 세상을 얼마나 잘 다스릴 수 있을지 큰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명예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전사나 더 큰 이익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던지는 상인이 세상 물정에 훨씬 더 정통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들이 세상 너머의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자보다 국가를 훨씬 더 잘 다스리지 않을까.
철인정치론의 배후에는 야성이 넘치는 웅혼한 분위기의 영웅시대를 끝내고 초월적 진리에 근거하여 도덕과 정의의 시대를 열고 싶어 했던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열망이 자리 잡고 있다. 도덕과 정의를 향한 그런 열망이 전사의 용기와 상인의 계산보다 철학자의 지혜를 더 값지게 여기는 가치관의 대전환을 가져왔다.
◇유교의 성왕론과 운동권의 득세
거의 같은 시기, 중국에서는 공자와 맹자가 등장하여 고대 전사의 영웅적 용기를 깎아내리고 도덕과 정의에 투철한 성인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성왕론을 주장했다. 특히 맹자는 용기를 우주에 가득 찬 생명력과 같은 호연지기(浩然之氣)로 보면서 호연지기를 잘 기르려면 도덕과 정의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맹자도 플라톤처럼 전사의 용기를 철학자의 지혜 밑에 두고자 했다.
세상 안에서는 실현되기 힘든 도덕과 정의의 이상에 너무 집착하면 호연지기는 크게 위축될 위험이 있다. 도덕군자의 편협함과 위선을 보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맹자를 읽고 그런 질문을 던지는 유학자는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싸움 잘하는 전사나 돈 잘 버는 상인을 무시하고, 공부 잘하는 선비만 대접하고, 급기야는 오직 선비에 대해서만 권력 잡는 걸 당연시하는 유교 전통이 정착되었다.
문(文)을 존중하고 무(武)를 경시하는 유교 전통은 맹자로부터 시작되어 주자에게로 이어져 주자학만 숭상하던 조선조 500년을 완벽하게 규정하기에 이르렀고,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오늘날까지 상당 부분 규정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오늘날의 대한민국에는 철인정치론이나 성왕론이 갖는 현실적 효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뜻밖에도 매우 드물다.
한국인들이 1980년대 명문대 운동권 출신들에게, 그들이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혹은 도덕과 정의를 내세운다는 이유로, 권력을 몰아주고 있는 걸 보면 철인정치론이나 성왕론이 아직도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자신은 명예나 이익을 위해 평생 동분서주하는 현실주의자이면서 선거 때만 되면 도덕과 정의를 내세우는 이상주의자에게 표를 던지는 심리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비극적 현실에 대한 운명적 사랑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인 지식인을 우리는 '먹물'이라 부른다. 과거의 철학자와 선비는 공부를 너무 많이 한 탓에 먹물이 되기 쉬웠던 반면, 1980년대 명문대 운동권 출신은 슬로건 몇 개 암기한 것 외에는 공부한 게 너무 없어서 먹물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대한민국은 언제부터인가 유식한 먹물들이 아닌 무식한 먹물들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다. 무식한 먹물들이 어디선가 주워듣거나 좋지도 아니한 머리로 짜낸 '이상'이 대한민국의 '현실'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을 지키고 키운 군인들과 기업인들은 무식한 먹물들이 내세우는 그럴듯한 이상 앞에서 늘 고개를 숙인 채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있다. 도덕과 정의의 한계를 지적하는 말을 배운 적이 없으니 할 말이 없는 것도 당연하다. 게다가 그들을 대변해 줄 현실주의적 먹물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잘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인간의 말 자체가 원래 이상주의적 먹물의 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세상의 현실은 먹물들의 이상에 따라 굴러가지 않는다. 나의 도덕과 너의 도덕이 다르고, 나의 정의와 너의 정의가 다르다. 불변의 절대적 도덕이나 정의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 결과, 세상은 좌파와 우파의 끝없는 싸움이 잘 보여주듯이, 스스로 옳다고 믿는 자들 사이의 싸움으로 점철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세상의 현실은 늘 비극일 수밖에 없다.
비극적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세상 너머의 진리에 근거한 도덕과 정의의 아름다운 이상이 아니다. 철인정치론이나 성왕론 따위는 버리고, 무엇보다 먼저 비극적 현실을 아무리 참혹하더라도 우리의 운명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 자세를 견지하려면 전사의 용기가 필요하다. 인간이면 누구나 남보다 더 잘난체하고 싶고 남보다 더 많이 가지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인간들 간의 갈등은 그런 욕망들 간의 갈등이고, 이것이 비극적 현실을 낳는다. 철학자의 지혜는 비극적 현실 너머 이상세계로 초월하려 하는 반면, 전사의 용기는 비극적 현실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다음, 비극적 현실 안에서 극복의 실마리 혹은 타협점을 찾는다.
◇진리와 권력의 결합
세상 사람들에게는 세상 너머의 진리를 알려주는 철학자나 성인도 필요하다. 싸움으로 점철된 세상은 고통스럽다. 사랑으로 가득 찬 절대적 선의 세계에 대한 희망이 세상 사람들의 숨통을 열어준다. 하지만 철학자나 성인이 세상의 비극적 현실에 직접 개입하게 되면 그들은 무자비한 폭군이 되고, 세상은 유혈로 얼룩지거나 처참한 빈곤에 빠질 위험이 크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플라톤의 철인정치론이 현실화될 뻔한 적이 세계사에서 여러 번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때마다 권력을 쥔 철학자는 악마가 되었다. 프랑스혁명 때의 로베스피에르가 그랬고, 러시아혁명 때의 레닌과 스탈린이 그랬다. 중국의 모택동과 북한의 김일성은 그들보다 더한 악마였다. 다른 한편, 유교의 성왕론을 현실화하려고 무진 애쓴 나라가 조선이었다. 조선의 왕들은 무조건 성인이 되어야 했다. 그 결과, 조선은 가난하고 힘없는 나라로 장기 지속하다가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상호모순적인 진리와 권력이 결합하면 진리는 사라지고 살벌한 권력만 남거나 권력은 사라지고 무기력한 진리만 남는다. 레닌과 스탈린과 김일성이 살벌한 권력의 본보기였다면 조선의 성왕들은 무기력한 진리의 본보기였다. 어느 경우이건 비극적 현실을 긍정하지 못하고 비극이 없는 저 너머의 아름다운 이상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비극적 현실을 서둘러 뜯어고치려 한 결과다.
◇하나님 나라가 오지 않는 이유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예고했다. 하지만 2000년이 더 지난 오늘날까지 역사의 비극적 현실은 그대로이고 하나님 나라는 아직 요원하기만 하다. 예수님은 왜 자꾸 약속을 어기는 것일까. 예수님이 역사의 비극적 현실을 방치하고 있는 이유가 무언지 깊이 고민해 봐야 한다.
성공회 신부 출신의 어느 정치인은 정치자금 문제로 감옥에 가면서 이 땅의 역사 속에 하나님 나라를 만들고 싶었다는 말을 남겼다. 예수님도 하지 않았던 일을 인간이 하겠다고 나선다면 폭력을 동원할 위험이 커진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즉각 줄여주는 방법이 폭력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랑을 해도 비극적 현실 안에서 사랑을 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사랑은 비극적 사랑이다. 미움과 계산에 의해 오염되지 아니한 순수한 사랑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순수한 진리에 근거한 철인이나 성왕의 정치가 아니라 비극적 현실감각에 기초한 비극적 관용, 그리고 순수함을 포기할 줄 아는 비극적 지혜가 필요하다.
비극적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면 아름다운 이상에 집착하는 철학자와 선비와 먹물의 비난을 견뎌내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다른 한편, 이 땅의 철학자와 선비와 먹물은 비극적 현실을 받아들이진 못해도 그 앞에서 겸손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폭력과 쉽게 악수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폭력은 스스로 옳다고 믿는 자들의 폭력이다.
최진덕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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