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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경험적으로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알 수 있다'는 영역을 이해하려는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시도다. 과학이 알려지지 않은 것을 깊이 탐색하면 할수록, 경험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해 알 수 없는 정도가 넓고 깊다는 것을 더 많이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과학적 사고는 어느 사이엔가 철학적 사고로 이동한다.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침투는
경험적 객관성을 점차 확보하지 못하면서 철학으로 전환된다. 그리하여 신비를 침투하려는 진정한 과학은 철학으로 가는 길 위에 있다. 그것이 신비의 핵심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알 수 있는 것이 알 수 없는 것과 더 많이 섞인다. 그리고 알려지지 않았지만 알 수 있는 것에 대한 경험적 지식은, 경험적으로 알려진 것에 입각하여 경험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을 고찰하는 형이상학적 사유로 전환된다.
합리주의적 실증주의(rationalistic positivism)는 과학과 철학 사이의 이런 미묘한 연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경험적 세계에서 정밀과학의 성공에 매료되어 그것은 바로 알 수 없는 것의 존재를 보지 않았다. 합리주의적 실증주의는 과학을,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 것과 이미 알려졌거나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원칙적으로 알 수 있고 또 과학의 발전에 따라 조만간 확실히 알게 될 것으로 이루어진 우주에 관한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지식으로 간주한다. 여기에서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 사이의 관계는 엄밀하게 양적인 관점에서 생각된다. 과학에 관한 이런 개념에서 빠진 것은 우리 지식의 적합성과 무한하게 그리고 또 우주에 관해 알고 싶은 우리의 욕망 사이의 긴장이다. 왜냐하면 무한대는 여기서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시간이 감에 따라 알려질 대상들의 집합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역시 빠져 있는 것은 우주의 신비들에 의해서 갇혀 있는 인간 지식의 비극적 한계의 깨달음이다. 왜냐하면 그 철학에서 오늘날의 신비들은 과학적 탐구를 위한 내일의 대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은 무한하다. 이 발언은 옳다. 왜냐하면 과학적 진보란 진실로 우주의 신비들에 관한 점진적 침투에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을 틀리게 만드는 것은 신비들을 하나씩 밝힐 뿐만 아니라 신비 그 자체를 인간의 의식에서 제거함으로써 과학의 완전한 승리에 관한 암묵적 기대다.
학자는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서 그는 오직 짐작할 수 있는 것의 구성자다. 진정한 과학적 문제는 인간 존재의 전체적 불안, 즉 우주의 문제적 성격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그것의 가장 깊은 곳에서 그것은 인간의 존재가 내장된 신비의 안개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리하여 과학적 언명은 그것이 자신의 경험적 방법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실제로 주장한다. 진정한 과학적 언명은 그것이 체계적 지식이기 때문에 철학과 함께한다.
종교는 철학이 우리로 하여금 개념적 추리를 이용하여 경험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을 의식하게 하는 것과 같이 우화와 상징을 이용하여 그렇게 한다. 종교도 역시 경험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또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경험적으로 알려진 것으로부터 결론을 내지만 그러나 그것은 경험적 세계를 알려지지 않는 것에 투사하는 이미지와 징표를 통해서 그렇게 한다. 종교적 도그마가 인간의 이성으로 하여금 이런 이미지와 징표들을 알 수 없는 것의 구성으로서가 아니라 경험적 지식으로 수용하게 강요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객관적 경계선들을 침범하여 그 자체뿐만 아니라 과학까지도 신빙성을 떨어트린다. 그것은 진리를 위한 절대적 타당성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새로운 경험적 지식에 그것의 이미지와 징표들의 우주를 적응시키길 주저할 수밖에 없다. 각 새로운 경험적 지식은 알지 못하는 것으로 들어가서 그 자체로서 종교적 진리의 신빙성을 위협한다.
원칙적으로 형이상학이 새로운 경험적 지식에 비추어 개념적 틀을 수정할 수 있는 반면에 종교적 진실과 모순되는 과학적 진실은 종교적 진실의 신빙성을 모두 의문시한다. 종교의 진실은 하나다. 만일 그것이 하나의 언명에서 타당하지 않다면 그것은 모두가 타당하지 않게 된다. 과학은 경험적으로 입증될 수 있는 것만을 진실이라고 수용하는 반면 종교는 적어도 경험적으로 입증된 것이 원칙적으로 계시된 진실과 모순된다면 이의 수용을 거부한다. 그래서 과학과 종교 사이에는 실존적 갈등이 존재한다.
종교와 과학 사이에는 3가지 가능한 관계가 있다. 원래의 의미에서 종교는 그 자신의 합당한 수단으로는 경험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것에 관한 그림을 그린다. 원래의 의미에서 그것은 그 자신의 이미지와 징표를 통해 경험적으로 알려진 세계를 구축하려고 모색한다. 원래의 의미에서 종교는 형이상학적 철학과 동일한 기능적 수준에서 작동한다. 그것의 부적절한 의미에서 종교는 이데올로기다. 그리하여 경험적 지식이 이미 인정했거나 아니면 인정할 수 있는 현실을 감춘다. 경험적 세계에 대한 종교적 성찰로서 그것은 통일된 체계적 견해의 관점과 용어에서만 세속적 종교와 다른 과학의 한 영역이다.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과학과 종교의 차이와 동일시하는 것은 기계적 과학주의의 근본적인 오류들 중 하나다. 예를 들어, 중세의 위대한 정치이론의 체계는 상당히 정치에 관한 진정한 이론적 성찰의 결과였다. 세인트 어거스틴(St. Augustine)과 홉스의 정치철학은 그들의 용어에서 다르지만 정치현실을 이해하는 방식에서는 그렇지 않다. 다른 한편, 어떤 근대의 정치이론들은 그것들의 불경한 용어가 종교적 유형의 사고를 숨기는 진실로 이데올로기들이다. 종교적 제도들과 도그마들이 그것들의 설득력을 많이 상실한 역사의 시기에 종교적 태도 그 자체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전통적 이미지와 징표들 그리고 그것들의 개념적 어원들이 이제 더 이상 인간의 의식을 세상의 신비에 열 수는 없지만 사물 그 자체, 즉 그런 신비들과 통합하려는 열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인간이 신비들을 의식함으로써 세상과 통합을 추구할 때는 언제나 종교적 충동이 작용한다. 그리하여 종교적 충동은 경이의 충격에 의해서 신비들을 풀려고 이동하는 진정한 과학적 사고에서 작동한다.
바로 그런 이동에서 종교, 철학 그리고 과학은 하나다. 그것들은 그 이동의 외부적 표현에서만 다른 것이다. 적절한 의미에서 철학과 종교는 균등하게 신(神)에 가깝다. 철학과 종교는 개념적 구성을 통해 그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신비들에 접근한다. 과학, 즉 경험적 세계에 관해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사고와 경험적 세계에 관한 종교적 성찰은 균등하게 신에 가깝다. 과학과 종교는 다 같이 이론적이고 체계적인 이해로 신비들에 접근한다.
과학은 그 자체를 위한 순수한 사고가 아니며 인간의 유한한 목적에 직접 봉사하지도 않는다. 과학은 인간을 위한, 즉 인간이 그것을 통해 세상을 마주하는 경이로움의 충격을 위한 지식이다. 과학은 인간이 세상을 의식할 수 있고 그리하여 인간으로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는 방식들 중의 하나다. 인간이 세상을 의식한다는 것은 고통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의식은 세상에 대해 인간의 불충분성을 내포한다. 즉 경험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위험, 즉 자신과 세상 사이의 분열과 무한한 가능성의 뚫을 수 없는 어둠의 한가운데에서 의식의 미세함의 위험에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짐승들도 위험에 노출된다. 그러나 그것들은 오직 이동의 고통을 느낄 뿐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고 미래를 예상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고통을 받지 않는다.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경험에서뿐만 아니라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자기 존재의 불충분성을 의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에서 인간의 삶이란 불충분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자기의 삶에 대한 인간의 의식은 고통이다. 개념적 추상의 방법을 통해 이런 삶을 의식하게 하는 과정으로서 과학적 지식도 그렇다. 인간은 세상의 일부가 자기의 의식을 빠져나가는 한 고통받는다. 왜냐하면 그가 세상을 완전히 의식하지 않는 한 그는 위험하다. 그러나 궁극적인 지식은 인간의 가능성을 초월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에 고통받는 것이다.
세상 전체는 오직 신의 의식에만 들어 있다. 왜냐하면 전지(omniscience)란 신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의식과 세계의 완전한 통합에서는 고통이 있을 수 없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세상으로부터 인간 의식의 분리가 인간의 본질이고 그래서 인간은 고통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은 인간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은 의식과 세상 사이의 통일을 단절할 수 있고 그리고 고통받을 수 있다. 그리하여 신은 고통받지만 그 고통 속에서조차 자기의 신성(divinity)을 확인하는 '인간의 아들'이 된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고통을 의식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고통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고통은 그 자신의 고통이 된다. 그리하여 그는 고통을 통해 세상과 하나가 된다. 그 바로 그 인간 속에서 신과 인간은 하나다.
인간의 미래는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달려 있다. 비록 인간이 타인들과 사회적 연계 없이는 살 수 없지만 인간은 홀로 자치로운 성찰의 고독 속에서 인간으로서 자기의 미래를 결정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신성의 미래도 결정한다. 인간의 존재는 신성에 대한 의식과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만일 인간의 의식이 무한한 세상과의 통일을 위한 자기의 열망에 의해서 심화되고 확장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무엇이 될 것인가? 신성에 대한 의식이 없다면 인간은 고도로 발전된 원숭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존재에서 특별히 인간적인 것을 보존하는 이런 과업은 학자들을 진정으로 최고로 진정한 인간으로 만든다. 역사의 현 단계에서 지식 자체를 위해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거나 인류의 도덕적이고 물질적인 진보에서 자기 사명의 충족을 발견하는 학자들이 아니라 고통받는 경이로움의 충격에 의해서 열린 자기의 의식을 무한을 향해 뻗는 학자들이 인간의 진정한 사명을 충족하고 있다. 이 시대에 오직 이러한 학자만이 무한과의 대화에서 과학의 사명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명을 실현하는 유일한 존재다. 그에게 의식이 동반하는 고통의 안전한 탈출구는 인생의 황혼에 홀로 서서 맞이하는 체념의 미학뿐이다.
(그동안 애독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굿-바이!)
강성학(고려대 명예교수)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