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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흙이 된 이름을 다시 부르다 ‘아사카와 다쿠미 심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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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12. 08. 15:00

망우역사문화공원의 기억을 무대에 올린 입체 낭독극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한 사람의 진심을 되살리는 시간
아사카와 다쿠미 심는 날 포스터
잊힌 이름을 다시 부르는 시간이다. 중랑문화재단과 한국연극인복지재단이 함께 이어온 기억의 무대 '망우열전' 프로젝트가 올해 마지막 공연을 선보인다. 입체 낭독극 '아사카와 다쿠미 심는 날'이 12월 10일 오후 7시 30분, 중랑구민회관 대공연장에서 열린다. 무료 공연이라는 점에서 더 많은 시민과 함께 기억을 나눌 수 있는 귀한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망우역사문화공원은 서울의 한켠에서 조용히 시간을 품고 있는 역사적 장소다. 일제강점기의 모진 시대를 버텨낸 예술가와 사상가들이 이곳에 누워 있다. 방정환의 어린이 운동, 박인환과 이상의 문학 정신, 화가 이중섭이 남긴 예술의 언어까지. 망우리의 묘역을 걷다보면 한국 근현대사의 섬세한 결이 발끝에서 움튼다.

2021년 시작된 '망우열전'은 그 이름들을 단순히 떠올리는 것을 넘어, 예술적 해석과 창작을 통해 오늘의 관객에게 되살리는 프로젝트다. 지난 5년 동안 약 200명의 연극인이 재능을 기부하며 예술인의 연대를 실천했고, 그 과정은 곧 공동체가 기억을 확장하는 문화적 사건으로 자리 잡아 왔다.

아사카와 다쿠미
아사카와 다쿠미 / 사진 중랑문화제단
올해 마지막 주인공은 조선을 깊이 사랑했던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다. 1891년 일본 야마나시현에서 태어난 그는 1914년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를 따라 조선 땅을 밟았다. 조선총독부 산림과 임업기사로 근무하며 산림 복구와 조림 사업에 헌신하던 그는 오엽송 노천매장법을 고안해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양묘 기술을 이루었다. 광릉수목원의 조성에도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고 훗날 한국 인공림 수종 구성에서 그의 노력이 여전히 확인된다.

하지만 그가 조선을 사랑한 방식은 단순한 직업적 성취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종자 채집을 위해 산과 들을 누비며 조선의 언어와 생활문화를 깊이 이해했고, 그 경험은 곧 민예 연구로 이어졌다. '조선의 소반' '조선도자명고' 등 저술 활동을 통해 조선 공예의 아름다움을 일본에 소개했고, 1916년 야나기 무네요시와의 만남은 조선 민예운동이 꽃피우는 중요한 촉매가 되었다. 미학과 기술, 생활의 정신을 통합한 그의 시선은 민예가 지닌 인간적 가치를 지켜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사카와는 스스로 조선인의 삶에 가깝게 다가가기를 선택했다. 바지저고리를 입고 조선 음식을 먹고 조선 민중과 같은 집을 살아가며,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경제적 도움도 아끼지 않았다. 국가적 폭력을 전제한 식민지 체제 속에서도 한 개인이 선택한 진정성 있는 우정과 연대는 당시 조선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1931년 식목일 행사를 준비하다 과로로 생을 마감한 뒤, 그는 자신의 유언대로 조선식 장례를 치른 후 망우리 땅에 묻혔다.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입체 낭독극 '아사카와 다쿠미 심는 날'은 이 한 문장 안에 응축된 삶의 결을 무대로 펼친다. 평범한 식목일 행사로 시작된 축제는 갑작스러운 일본인들의 등장으로 뒤흔들린다. 언어가 달라 오해는 커지고 추격전처럼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이어지지만, 이는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망우리 영혼들의 음성에 이끌리듯, 관객과 배우는 한 이름의 진짜 이야기를 찾아 나선다. 상여를 들었던 어르신의 증언이 삶의 흔적을 열어젖히고 빈 관을 회다지놀이로 다시 세우는 장면이 이어질 때, 잊힌 존재는 비로소 현재의 관객과 다시 만나게 된다. '심는다'는 행위가 나무뿐 아니라 기억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cast
사진 중랑문화재단
이번 작품의 원안과 연출을 맡은 오세혁은 연극과 뮤지컬을 넘나들며 묵직한 메시지를 지닌 무대를 만들어온 창작자다. 서울연극제 대상 작품 '관저의 100시간'과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아르토, 고흐', 그리고 '보도지침', '초선의원' 등 사회적 질문을 던지는 작업으로 관객과 평단의 신뢰를 쌓아왔다.

그는 이번 무대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너무 깊게 묻혀버린 그분을, 늦었지만 뜨겁게 다시 심는 무대가 되고 싶습니다. 그분의 뜻과 마음과 사랑을." 이 문장은 이번 공연의 핵심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망각의 땅 속 깊이에 묻힌 인간을 다시 불러내는 것. 그 행위는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치와 책임의 무게를 함께 지는 일이다.

양정인, 여은비, 연시현, 이수진, 이해경, 이현종, 정이듬, 조수민, 조하은, 지수정, 최광, 최성우, 최소현, 최종우, 허다연 등 총 15명의 배우가 참여해 작품의 호흡을 함께 만든다. 배우들이 창작 과정 전반에 함께 참여한 공동창작 방식은 무대에 생생한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또한 관객 참여형 구조를 도입해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허물고, 관객이 이야기의 일부를 체험하도록 설계했다. 기억을 향한 걸음에 관객이 실제로 동행하는 공연이라는 점도 이번 작품의 특별함이다.

'아사카와 다쿠미 심는 날'은 한일 양국 사이에 남은 상처를 건드리기보다, 한 개인의 정직한 마음을 바라보려는 시도다. 기억을 정의하는 것이 언제나 국가나 제도였다면, 이 무대는 기억의 주체를 시민과 예술로 옮겨온다. 예술이 세대를 건너 마음을 잇는 방식은 결국 이렇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 그리고 그 이름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

차가운 바람이 망우리 언덕을 스치는 12월의 밤. 이 공연은 망각이 남긴 빈자리 위에 다시 나무를 심고자 한다. 한 사람을 기억하는 마음이 모일 때, 그 뿌리는 우리 모두의 역사로 자라난다. 예매는 중랑문화재단 홈페이지를 통해 가능하다.
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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