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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인간 이념적 극단성, 언어적 착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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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11. 23. 17:57

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6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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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 캐나다 맥마스터대 역사학과 교수
◇극단의 시대, 지구인은 누구인가?

"대체 인간의 양면성을 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천사와 악마가 인간의 마음속에서 날마다 전쟁을 벌이고 있는 건가요?"

외계인 미도가 툭 던지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과연 어떻게 대답해야 옳을까? 특히 인류사 최고의 성취와 최악의 전쟁범죄가 동시에 일어났던 20세기 역사를 돌아볼 때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가 홉스봄(Eric Hobsbaum, 1917~2012)의 저서 제목처럼, 20세기 인류사는 "극단의 시대(the Age of Extremes)"를 거쳐 갔다. 1억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두 차례의 세계 전쟁, 대공황과 대활황을 오가는 경제적 등락, 지역 경제의 비대칭적 불균형, 선악과 시비로 양분된 이념적 극한 대립 등등 20세기의 그 짧은 100년 동안 지구 전역에서 역사적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극단적 양상이 표출됐다.

18세기 중엽 이래 과학기술 문명의 비약적 발전과 산업혁명의 성과를 직접 경험한 서구인들은 인간이 비로소 편견과 미신을 타파하고 전통과 관습의 타성을 벗어나 이성을 가진 독립적 사유 주체로서 도덕적 자율성과 정치적 중립성과 법적 합리성을 발휘할 수 있으리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계몽주의란 인간이 스스로 자신에게 들씌운 미성숙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인식론적 대탈출이었다.

칸트가 20세기 거의 1억명의 인명을 앗아간 대규모 세계 전쟁의 참상을 직접 보았다면 무엇이라 했을까? 밤하늘 먹구름이 별빛을 가리듯 불합리와 부조리가 잠시 눈부시게 빛나는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켰다고 할까? 인간의 이성을 신뢰했던 칸트였지만, 절대로 그는 이성이 아무 노력도 없이 저절로 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성을 발현하기 위해서 인간은 체계적 노력으로 사고력과 판단력을 계발해야 함은 물론, 의식적이고 체계적인 인성 교육과 도덕 훈련을 통해 본성에 내재하는 악의 씨앗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그는 이성이 마음의 가장 사악한 욕구를 합리화하는 변명의 도구로 악용될 수 있음을 알고 경계했다. 후대 학자들 역시 가치 합리성과 대비되는 도구적 합리성(instrumental rationality)이란 개념으로 이성이 사특한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로 타락할 수 있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20세기 여러 지역에서 줄곧 자행됐던 인종청소나 계급 학살의 발생 원인이 고작 잘못된 목적 아래서 이성이 악을 행하는 도구로 오용됐기 때문이라 말한다면, 과연 충실한 설명이 될 수 있을까? 인간이 그릇된 목적으로 그 이성을 악용하고 악행을 자행하고 정당화할 수도 있는데, 이성 그 자체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오히려 합리적 사유 속에 이미 인종적·계급적·성적 편견과 우월의식이 깔려 있다는 설명이 더 설득력을 갖는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버섯구름
1945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버섯구름.
◇인간적 극단성의 뿌리는 무엇일까?

물론 인간만이 예외는 아니다. 모든 생명체는 위기의 상황에서 적자생존의 공격성을 발휘한다. 사자, 늑대, 침팬지 등도 짝짓기, 먹이활동, 영역 다툼의 과정에서 동종을 살상하는 폭력성을 보이기도 한다.

동물학자 구달(Jane Goodall)의 관찰연구에 따르면, 탄자니아 밀림에서 한 침팬지 집단의 수컷들이 무리 지어 다른 집단의 수컷들을 죽이는 '곰비 침팬지 전쟁(1974~1978)'이 발생했다. 침팬지 전쟁은 충격적이지만, 인간의 전쟁에 비교하자면 기껏해야 소규모 패싸움의 결과일 뿐이었다. 사피엔스의 대량 학살은 그 희생자가 때론 수백만에 달할 정도로 광범위하고, 조직적이며, 잔인하고 사악한 양상을 보인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피엔스의 정신세계에 잠재하는 이념적, 정치적, 감정적 극단화 경향이 근원적 병인(病因)일 수도 있다. 사피엔스만 제외하면 지구상에서 번성하는 그 어떤 생명체도 동종의 다른 집단에 대한 조직적 대량 학살을 자행할 만큼이나 극단적 감정 분출이나 극악한 행동 양상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왜 유독 사피엔스는 치우친 생각, 지나친 언행, 과도한 욕구, 무리한 조치를 일삼고 있는가? 사피엔스의 극단화 경향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유전적 변이인가? 문명의 역리(逆理)인가? 정신적 질환인가? 악마성의 발현인가?

지구 위에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인류가 당면한 이 중대한 문제를 회피할 수 없다. 세월이 갈수록 인간의 정신은 더욱 과도한 극단화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혼란스러운 탈진실(post-truth)의 시대 지구인들 대다수는 이미 손바닥 위 작은 화면으로 실시간 전달되는 수많은 가짜뉴스와 거짓 풍문에 휩싸여 명철한 분별력이 마비돼 버린 알고리즘의 포로들로 살아가고 있다. 그 결과 지금 인류는 대화의 기술과 타협의 지혜는 망각한 채로 저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며 좌나 우의 극점을 향해 앞다퉈 달려가고 있다. 묻지 않을 수 없다. 대체 왜 사피엔스만이 다른 동물과는 달리 유독 극단적 양상을 보이는가?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참상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참상.
◇언어에 내재하는 이념적 극단성

이러한 질문을 화두(話頭)로 붙들고 인간의 역사를 돌아보면 중요한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호모 사피엔스의 정신적 극단화 경향은 인간의 오랜 언어적 습관에서 발생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세계를 언어적으로 인식한다. 언어를 떠나선 사유 자체가 진행되지 않는다. 언어로 표현되지 못한 상태의 '생각'이란 기껏 마음속에 어지럽게 떠도는 심상(心象, image)이나 감각(感覺, sense)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의식에 떠오른 그 심상이나 감각을 언어적으로 분석하여 기쁨, 슬픔, 아픔, 그리움 등의 단어를 떠올리지만, 많은 순간 언어는 인간 내면의 복잡한 감정과 생각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언어는 자연 상태의 객관적 대상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구현할 수가 없다. 언어는 대상을 부르는 이름일 뿐, 그 대상의 존재론적 실체를 밝히진 못한다.

우리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치며 잎을 피우는 식물을 보면 '나무'라고 인지하지만, 그 나무의 존재론적 실체가 무엇인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나무'란 단어는 나무로 지칭되는 외부의 객관적 대상을 가리키는 언표(言表, linguistic sign)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언어와 존재 사이에는 그렇게 커다란 괴리가 있다. 존재의 현실은 난해하고 복잡한데, 인간의 언어는 간명하기 그지없다. 간단명료한 언어를 써서 복잡다단한 현실을 묘사할 때는 불가피하게 단순한 일반화의 오류가 발생한다. 누구든 그러한 오류에 빠져들면 언어적 인식 자체가 곧 존재의 객관적 실체와 같다고 생각하게 된다.

한 철학자가 말했듯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 지도든, 모형이든, 언어적 묘사든, 신념의 표출이든 객관적 현실에 대한 인간의 표현은 현실 그 자체일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너무나 쉽게 언어로 표현된 세계를 현실의 세계라 믿어버린다. 유발 하라리(Yuval Harari)가 주장하듯, 사피엔스는 언어로 구성된 '픽션(fiction)'을 객관적 현실이라 굳게 믿는 인지적 경향을 보인다.

하라리는 바로 그 점이 인간 등정(登頂)의 비결이라 설명하지만, 거기엔 커다란 위험이 따라온다. 픽션을 실체라 혼동할 때, 다시 말해, 언어와 존재를 분간하지 못할 때, 인간은 존재의 복잡한 현실을 망각하고, 언어에 따라붙는 이미지의 허상을 실체적 진실이라 여기는 인지적 착오가 발생한다. 이제부터 그 인지적 착오가 어떻게 이념적 극단화를 부추기는지 역사적 실례를 찾아 점검해 보자.

송재윤 캐나다 맥마스터대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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