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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진보는 역설적으로 불안을 증폭시킨다. 경쟁과 타인의 시선, 사회적 잣대가 우리를 끊임없이 구속한다. 행복을 향한 주체적 의지라 믿었던 궤적은 쇼펜하우어가 말한 '고통과 권태 사이를 왕복하는 진자 운동'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그는 인간의 의지를 '끝없이 갈망하지만,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욕망의 원천'으로 본다. 우리는 끝없는 비교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잊고 방황한다. 그렇게 한 해를 시간의 강물에 흘려보내며, 존재의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또 한 번의 겨울을 맞이한다.
이와 같은 인간의 본성을 가장 섬세하게 탐구한 작품이 바로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Of Human Bondage)'이다. 주인공 필립 캐리의 인생은 인간이 내면의 결핍과 싸우며 성숙에 이르는 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선천적인 기형의 발 때문에 늘 열등감과 고독 속에서 살아간다. 이 신체적 결함은 라캉이 말한 근원적 결핍과 고통의 굴레를 시각적으로 상징한다. 그는 외로움 속에서 신앙에 기대지만, 결국 신학을 포기한 채 세상으로 나간다. 독일과 파리에서 예술과 삶의 다양함을 경험하지만, 재능의 한계를 깨닫고 "인생은 자신이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라는 현실과 마주한다. "나는 결코 내 삶을 내 뜻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라는 고백은 결핍의 진실을 가장 인간적으로 경험한 순간이며, 욕망을 통해 자기를 만나는 고통의 언어다.
영국으로 돌아온 필립은 의학 공부를 시작하고, 그곳에서 웨이트리스 밀드리드를 만나 강렬한 집착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밀드리드는 필립의 진심을 이용하고 냉담하게 떠난다. 그럼에도 필립은 그녀를 잊지 못하고, 그녀가 돌아올 때마다 모든 것을 내주며 집착과 굴욕의 악순환을 반복한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여전히 그녀를 필요로 했다." 그는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타인을 통해 자신의 결핍을 메우려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욕망이 낳은 '결핍의 그림자'다. 자신이 매달린 것은 사랑이 아니라 소유였음을 인정한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의지의 무한 갈망'이 바로 그를 옭아맨 굴레였다. 그 인식의 순간, 필립은 집착의 사슬에서 천천히 벗어난다.
삶의 평범한 순간 속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일은 결코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필립 역시 사랑의 실패, 가난, 좌절을 겪으며 자기 내면과 치열하게 마주해야 했다. 절망 속에서도 그는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다정한 상인 가족과의 일상, 친구와 나누는 웃음,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노래, 노을에 물든 하늘의 평화 속에서 다시 살아갈 이유를 찾는다. 그렇게 작은, 평범한 순간들이 쌓여 인생의 진정한 위안을 이룬다.
행복이란 먼 곳의 거대한 성취나 특별한 사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일상에서 느끼고 경험할 수 있다. 삶의 시련과 좌절 속에서도 필립은 소박한 일상에서 진정한 행복을 발견하고, 의사로서의 안정된 삶과 성실한 여인과의 결혼을 선택한다. 그는 인생을 거대한 퍼즐로 해석하지 않고, 흐르는 물처럼 수용하며, 세상의 굴레 속에서도 자신을 이해하고 누리는 평온이 진정한 자유임을 깨닫는다. 그 깨달음은 화려한 승리가 아니라, 조용한 수용의 지혜로 완성된다.
"우리가 좇는 행복은 거창한 성취에 있는가, 아니면 평범한 일상에 이미 존재하는가?" 필립이 우리에게 던지는 근원적인 질문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경쟁과 집착의 굴레 속에서 잊고 지낸 소소한 기쁨의 가치를 다시 바라보고, 그것을 사랑하며 긍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위안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태도의 근본적인 변혁이다. '인간의 굴레에서'는 인간 내면의 고통스러운 성장을 통해 '삶의 의미는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주제를 전한다.
필립의 여정은 인간 존재의 갈망과 두려움을 상징하며, 우리 역시 성공과 인정의 사슬에 갇혀 있음을 깨닫게 한다. 진정한 자유는 욕망을 버리는 데서 오지 않는다. 오히려 욕망의 본질을 이해하고, 불완전한 자신을 끌어안는 데서 시작된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여전히 비교와 경쟁의 굴레 속에 있지만, 평범한 순간에 기쁨을 느끼며 자신만의 의미를 써 내려가야 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부족함 속에서도 삶은 아름답다. 인간은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그것을 이해하고 일상을 긍정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그 순간, 불완전한 하루가 오히려 가장 완전하게 빛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위대한 성취가 아니라, 평범한 순간 속 작지만 소중한 기쁨을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이다. 그 마음이야말로 결핍의 굴레를 넘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가장 인간다운 힘이다. 결핍을 이해하고 긍정할 때, 그 굴레 자체가 자아를 완성하는 역설적 토대가 된다.
윤일현 시인·교육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