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영국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 신미경(1967~)의 조각 작업 '비누로 쓰다: 좌대 프로젝트(Written in soap: A Plinth Project)'(2012-2013)는 '번역(translation)'을 화두로 꾸준히 작업해 온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다. 신미경은 그간 대리석, 청동, 도자기 등 무취의 견고한 재료로 된 각종 고전적 유물을 부드럽고 무르며 향이 있는 일상적 재료인 '비누'로 옮겨내는 '번역 시리즈'등의 작업을 지속해 왔다. 그의 이러한 작업은 고전적 전범들과 그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의 견고함을 무르고 부드럽게 전환, 재현해 냄으로써, 그 전범들과 관념이 절대적 가치로 여겨왔던 것들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신미경의 '비누로 쓰다: 좌대 프로젝트'는 런던 시내 옥스퍼드 서커스 부근 캐번디시 광장(Cavendish Square)에 2012년 여름부터 2013년까지 일 년 동안 설치되었던 공공 조각 프로젝트다. 광장은 일 년 내내 쇼핑객들과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런던 최대의 번화가이자 공공장소다. 작가는 2008년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광장 한쪽의 빈 좌대 하나를 발견하고, 좌대에서 사라진 '기념상'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약 4년간 작품 구상을 위해 기념상에 대한 자료를 추적한 끝에 광장의 옛 모습과 기념상의 설치 모습을 담은 동판화, 유화로 그려진 초상화, 그리고 50cm 높이의 기마 동상 모형을 찾아내었다.
신미경 작 번역된 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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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경, '번역 시리즈 2006-2013', 비누, 니스, 향료, 안료, 나무 상자, 가변크기, 사진제공 신미경 스튜디오. 신미경은 1997년부터 문화의 이동 중 발생하는 번역과 해석의 문제를 주목하며 작업해 왔다. 그녀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미국 휴스턴미술관, 영국 브리스틀 시 박물관과 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리움, 영국예술위원회 등에 소장되어 있다.
좌대 위에는 원래 18세기에 영국왕 조지 2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전쟁영웅으로 추앙받던 컴벌랜드 공작(Duke of Cumberland)의 기념 동상이 서 있었다고 한다. 컴벌랜드는 킹 조지 2세의 세 번째 아들이며 1688년 명예혁명 이후 국외로 망명한 스튜어트가의 제임스 2세를 군주로 다시 옹립하려던 스코틀랜드의 재코바이트 일당을 잔혹하게 학살하여 '인간 백정'이란 별명을 얻은 사람이었다. 1746년의 클로덴 전쟁에서 승리하였을 때 일시적으로 인기를 누렸다. 1770년, 공작 사망 5년 후 캐번디시 광장에 그의 기마상이 세워졌는데, 1세기가 지난 1868년 뒤늦게 스코틀랜드 학살에 대한 비난 여론에 떠밀려 철거된 후 텅 빈 좌대만 150년 동안 남게 되었다.
신미경은 높이 3m의 거대한 '컴벌랜드 공작의 기마상'을 자신이 찾아낸 초상화와 모형, 동판화에 그려진 자세를 기초로 비누로 만들었다. 그리고 컴벌랜드 공작의 기마상이 세워졌던 좌대 위에 비누로 만든 '컴벌랜드 공작의 기마상'을 설치하였다. 역사 속 실재 인물 영웅을 기념하여 만들었던 청동 조각상의 원본, 그것이 철거된 좌대 위에 예술 작품으로서 비누 조각상이 제작되어 설치되었던 것이다. 두 조각은 동일한 장소에 동일한 인물을 기념하고 제작하였다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150년이라는 빈 좌대의 시간차가 벌려 놓은 전혀 다른 두 개의 현실이 존재함을 가시화한다.
정치사회의 변화와 입장 속에서 100년 동안은 영웅으로 추앙되다가 150년간은 인간 백정으로 혐오되어 역사에서 끌어내려진 인물의 복원은, 청동이나 대리석처럼 단단하고 견고한 절대적 가치로서 복원된 것이 아니다. 무르고 녹아내리며 달콤한 향을 뿜는 비누로 한 인물을 복원한 것은 만지고 비빌수록 풍성한 거품이 이는 비누와도 같은 역사의 허구성, 절대적 가치의 허구성을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