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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과 법의 경계에서 던지는 묵직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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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8. 19. 08:22

연극 ‘재판’ 프리뷰
피해자였던 아버지, 피고인으로 법정에 서다
정의는 살아 있는가를 되묻는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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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재판' 무대를 준비하는 배우들의 연습 현장 / 사진 김현호레퍼토리
학교폭력이라는 사회적 상처와 법의 역할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연극 '재판'이 오는 8월 27일부터 31일까지 대학로 열린극장에서 무대에 오른다. 김현호레퍼토리가 네 번째로 선보이는 창작극으로, 매 작품마다 사회적 문제의식을 담아온 이 시리즈는 이번에도 예외 없이 오늘의 현실을 예리하게 비춘다.

작품은 학교폭력으로 딸을 잃은 아버지 강도윤, 곧 극 중 피고인을 중심에 둔다. 그는 오랫동안 법과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채 고통 속에 살아가다, 어느 날 딸을 괴롭혔던 가해 학생의 죽음을 계기로 살인 용의자로 법정에 서게 된다. 피해자였던 아버지가 피고인의 위치로 뒤바뀌면서 법정은 긴장과 혼란으로 요동친다. 검사는 CCTV와 다섯 명의 증언을 근거로 사건을 '계획적 살인'으로 규정하며 피고인을 몰아세우고, 변호사는 직접적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이는 단순한 심증에 불과하다며 맞서 치열하게 대립한다. 판사는 모든 진술과 증언을 검토한 뒤 깊은 고민 끝에 판결문을 낭독하게 되고, 그 순간 '정의는 과연 살아 있는가'라는 질문이 무대 위에 서늘하게 드리워진다.

연출과 극작을 맡은 김현호는 배우 출신으로, 현재 안산디자인문화고등학교 공연콘텐츠과에서 연극을 가르치며 창작극을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그는 "살면서 억울한 일을 겪거나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법과 정의는 피해자의 편에 설 수 있는가, 우리는 얼마나 자주 진실보다 확신을 믿으며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한 작품"이라며 이번 무대를 통해 관객과 함께 고민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김현호가 강조하듯 연극 '재판'은 단순히 교육적 효과를 노리는 작품이 아니라, 무겁고 진중한 극적 구성으로 법과 감정, 진실과 확신이 충돌하는 지점을 사실적으로 재현한다. 실제 재판 과정의 용어와 형식을 최대한 구현해 리얼리티를 살렸으며, 사건의 전개는 판사, 검사, 변호사의 시선을 교차시키며 입체적으로 펼쳐진다.

무대의 긴장감은 무엇보다 피고인의 절규에 응집된다. 극 중 피고인은 "정의는 죽었다!"라고 외친다. 이 한마디는 광기의 발현일 수도, 억눌린 고통의 폭발일 수도, 혹은 우리 모두가 이미 체감하고 있는 무력한 고백일 수도 있다. 법은 진실을 규명하고 사회적 정의를 실현해야 하지만, 때때로 피해자조차 가해자로 몰리게 되는 현실의 아이러니를 드러내며, 관객에게는 불편하지만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무엇보다 평범했던 일상의 순간들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간절하게 되돌아보는 피고인의 독백은 관객에게 가족의 의미와 삶의 본질을 다시금 성찰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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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재판' 무대를 준비하는 배우들의 연습 현장 / 사진 김현호레퍼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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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재판' 무대를 준비하는 배우들의 연습 현장 / 사진 김현호레퍼토리
연극 '재판'에는 총 13명의 배우가 출연한다. 판사 역은 이주연, 검사 역은 김세정, 변호사 역은 진주호, 그리고 피고인 역은 이일훈이 맡아 법정의 대립 구도를 이끌어 간다. 증인으로는 배달라이더 배승형, 정신과 의사 민슬기, 친구 송지원, 오형사 홍관보, 법의학자 조항선이 등장해 다양한 시각에서 사건을 증언한다. 여기에 피해자 역의 최나래, 피고인의 자녀 남보미, 피해자 부모 김진미, 법정 경위 유태한까지 합세해 무대를 채운다. 배우들의 다층적 연기가 얽히고설킨 진실의 퍼즐을 구성하며, 법정극 특유의 밀도와 몰입감을 극대화한다.

스태프진 역시 탄탄하다. 예술감독에는 동국대학교 공연예술학과 교수인 최영환이 이름을 올렸고, 제작감독은 신황철, 조명감독은 손바다, 음향감독은 전재영이 맡았다. 무대와 소품 디자인은 고은별과 송지원이, 영상감독은 남보미가 참여했으며, 기획에는 최은경, 조연출에는 양가희가 합류했다. '김현호레퍼토리'라는 이름으로 매년 새로운 작품을 발표해온 창작 레퍼토리 시리즈는 이번에도 제작과 연출, 출연진의 치열한 협업을 통해 한 편의 법정 드라마를 예술적 무대 위로 옮겨 놓는다.

김현호레퍼토리는 2022년부터 매년 한 편씩 창작극을 발표하며 공연 브랜드로 자리매김해왔다. 사회적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되 무대 언어로 승화시키는 것이 특징으로, 이번 작품은 그 연속선상에서 '학교폭력'과 '법의 모순'을 통해 관객과 더 직접적인 대화를 시도한다. 연출은 "작품을 통해 관객이 잠시나마 가족의 의미와 사회적 책임, 법의 역할을 되새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연극 '재판'은 단순한 법정극의 틀을 넘어, 우리 시대에 가장 절실한 질문을 무대 위로 불러낸다. 학교폭력의 상처와 가족의 상실, 그리고 법과 정의가 부딪히는 균열의 지점은 관객을 불편한 진실 앞에 세운다. 그러나 그 불편함은 우리가 외면해온 현실을 마주하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한다. 피고인의 절규와 판사의 판결, 증인들의 증언을 통해 관객은 '정의는 과연 살아 있는가'라는 물음을 다시 되새기게 되고, 극장은 하나의 법정이자 동시에 우리 사회의 거울이 된다.

결국 연극 '재판'은 단순히 한 사건을 재현하는 무대를 넘어, 오늘의 관객이 함께 고민해야 할 사회적 장치로 기능한다.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특정한 인물의 비극을 넘어,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의 책임과 선택을 묻는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관객의 마음에 오래 남을 울림은 결국 '정의'를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재판 포스터
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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