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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정의(Justice)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강성학 칼럼] 정의(Justice)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기사승인 2023. 03. 15.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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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인터뷰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정의란 무엇인가? 이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철학이 출현한 이래 지금까지 되풀이해서 제기되는 철학적 질문이다. 그 문제에 대한 철학적 명상과 정치적 논쟁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오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정의에 대한 일반적 정의가 수립된 적은 없었다. 정의란 법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의미한다고 하거나 혹은 완전하고 절대적인 평등상태를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개념적 갈등은 단지 철학적 충돌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 실력대결로 비화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그들 나름의 정의를 위해 항상 투쟁하며 심지어 서로 죽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타인을 정의의 이름으로 죽이는 것이 과연 정의일 수 있을까?

인간의 역사는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부조리의 연속인 것만 같다. 톨스토이의 이반 카라마조프의 생각처럼 부조리야말로 우리 세상의 적나라한 필연일지도 모른다는 역설적 감정을 떨칠 수 없다. 복수의 칼이 정의라는 미명 하에 휘둘러지고, 종교는 사랑을 위해 증오를 가르치며, 정치체제들은 자유를 위해 인민을 억압하고, 또 혁명은 행복을 빙자해 비극을 초래한다. 자신의 부조리를 깨달으면서도 동시에 정의를 외치는 것이 현대 인간의 의식이다. 경험과 사실의 세계는 부조리의 세계이다. 따라서 인간은 부조리의 세상에서 발견될 수 없는 정의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것만 같다. 물론 그러한 부조리성을 발견하는 것은 현대인만의 특권이나 저주는 아니다. 자연과 관습, 이성과 권력,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들은 인간 자체의 의식과 함께 시작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레이몽 아롱(Raymond Aron)이 일찍이 지적한 대로 역사의 모든 모순들이 일순간에 일소될 수 있다는 믿음이나 약속은 불의와 부도덕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에 대한 분노로 가슴이 불타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아편과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것을 종교에서 실현할 수 없고 또 혁명에 의해서도 구현할 수 없다. 인간은 정의를 위한 반란자는 될 수 있어도 혁명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 인간의 생생한 역사는 정의를 내세운 혁명이 역설적으로 더 큰 불의를 낳을 수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는 모든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인간적 열망이다. 그러나 그것의 성취는 언제나 열망에 미치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와 항상 함께하는 문제이다. 다만 오늘날 그 중요성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위협적이다. 우리는 그것을 더 극명하게 볼 수 있지만 해결책에 더 가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과학적 지식은 누진적이지만 도덕적 지식은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일찍이 장 자크 루소가 주장했듯이 각 세대는 전 세대 보다 더 많이 알기는 하지만 더 도덕적으로 행동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의지를 통해 효과적으로 선을 지향하게 하는 그런 종류의 지식 즉, 도덕적 지식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옛 조상들보다 별로 더 진보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소크라테스나 공자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은 우리의 이해와 실천을 상당히 초월한다. 우리는 원칙적으로 그것을 인정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거부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윤리와 종교에서 벗어나 세속적이고 물질주의적 허무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도덕적 지식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증가하는 것 같지 않다. 우리는 조상들이 했던 실수를 그대로 범한다. 자식들이 부모보다 더 도덕적인 삶을 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부모보다 덜 도덕적이다. 그렇다면 과연 가능한 해결책이 존재할까? 우리는 과학에서 대답을 찾을 수 없다. 원시적 마술처럼 과학은 수단에만 관계되지 않는다. 그것은 선한 목적에도 그리고 악한 목적에도 봉사하도록 이용될 수 있다. 요컨대 우리는 윤리적 교육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윤리학은 자연과학과는 달리 믿음을 제공하고 진리에 대한 대략적 윤곽을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윤리학은 수학적 엄밀성을 기대할 수 없는 지식의 영역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정의란 "인간으로 하여금 옳은 것을 행하기 쉽게 만들고, 올바르게 행위하며 옳은 것은 희구하게 하는 도덕적 성향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정의를 지향하는 인격의 기질(disposition)을 달성하는" 것이다. 그 기질은 감정에 대하여 우리가 잘 처리할 수 있고 또는 나쁘게 처리할 수 있게 하는 바탕이 되는 성격의 상태라고 했다. 그런 항구적인 인격의 기질을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는 도덕적 지식과 함께 도덕적 행위의 습관을 필요로 한다. 도덕적 행위의 습관화는 긴 시간을 필요로 하며 매우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자발적 행위,' 즉 자유로운 선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손쉬운 탈출구로 달려가려는 경향이 있다. 하나는 윤리에 대해서 잊고 싶어 한다. 정의에 관해 벌이는 그처럼 피곤한 '어리석은 논쟁'에 등을 돌리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또 하나의 손쉬운 탈출구는 도그마에 빠지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불의를 일소하려는 정의관을 절대시하고 정의를 위한 타협 없는 전쟁을 선포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종류의 불의에 속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제하는 데 있어서 즉, 극기의 면에 있어서는 우정이나 사랑이 정의보다 더 우월할지도 모른다. 우정이나 사랑은 타인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서로의 행복에 대한 관심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인 햄릿(Hamlet)의 철학적 의심을 리어 왕(King Lear)의 무분별한 사랑으로 상쇄하려 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결점을 다른 결점과 맞바꾸는 일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덕적 무관심과 주관적인 도덕의 절대화 사이에 균형을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에 따라야 한다. 물론 정의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이 결코 완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다소의 탁월한 실수들' 때문에 '아기를 목욕물과 함께'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정의라는 높은 산의 정상에 도달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시지포스(Sysyphus)처럼 끊임없이 우리는 항상 자유롭게 도덕을 배우고 습관화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우리가 어제와 오늘에 비해 내일은 정의에 더 가깝게 살아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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