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 당시 2200억 적자였던 하이닉스 작년 141조 누적 영업익 기업 키워내 서든 데스 위기론→ '딥체인지'로 진화 배터리 정리 등 그룹 리밸런싱 본격화 뉴 이천포럼서 "전속력 AI 전환" 띄워 울산 시작, 2035년 15GW AIDC 잰걸음 반도체-전력·냉각 등 '풀스택' 순항 중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재계와 산업계에 10년 후 미래 화두를 던지고, 이를 그룹의 울타리를 넘어 끝내 사회 전반의 어젠다로 올려놓는 총수다. 비전을 말하는 총수는 많지만, 그 비전을 끝내 실현시킨 이는 드물다. 2012년 주변 만류에도 적자투성이 메모리기업 하이닉스를 사들여 10년 후를 내다본 투자로 마침내 나스닥에 상장된 글로벌 톱티어 기업으로 키워냈을 때 그랬고, 부침을 겪게 된 에너지 화학사들에 대한 고강도 군살 빼기에 돌입해 성공적 사업 전환 그림을 그려가는 모습이 그렇다.
최 회장은 이제 이들을 총동원해 SK와 한국 산업에 대한 10년 대계를 또다시 추진 중이다. 이른바 'AI 풀스택', 하나의 기술이 아닌 AI 생태계 전체를 아우르는 조직으로 SK를 변화시키겠다는 포부다. 2035년까지 장장 1000조원을 쏟아부어 전국에 15GW에 달하는 초대형 AI 데이터센터 생태계를 구축하는 원대한 전략의 시작점에 섰다.
◇AI시대 병목 움켜 쥔 SK하이닉스… 인수가 대비 92배 벌었다 5일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SK하이닉스의 올 3분기 합산 전망치는 175조원을 넘어선다. 상반기 영업이익 98조1529억원에, 3분기 전망치 77조2214억원을 합산한 결과다. 2012년 인수 당시 2200억원대 적자를 냈던 SK하이닉스의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변화다. 인수 후 14년간 벌어들인 141조5254억원보다 최근 9개월간의 수익이 오히려 35조원가량 더 많다.
2012년 3조4267억원의 인수가 대비해선 92.5배를 벌었다고 보면 된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SK그룹이 2012년 인수한 이후 하이닉스는 지난해까지 총 141조5254억원의 영업이익을 냈고 올해 9월까지의 누적 전망치를 더하면 총 316조8997억원에 달한다.
최태원 회장은 지난 7월 15일 나스닥 ADR 상장의 감격을 SNS 링크드인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냈다. 최 회장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SK그룹이 진정한 글로벌 기업집단으로 인정받는 순간을 꿈꿔왔다"고 했고 "모두가 반대했던 결정이었지만 임직원들이 그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했다"며 14년 만에 과거 하이닉스 인수 결정을 공개 회고했다.
그는 "당시 많은 이들이 인수 결정에 의문을 제기했다. 회사는 파산 위기에 놓여 있었고, 메모리는 범용 제품으로 여겨졌다"며 "메모리는 반도체 산업에서 훨씬 더 큰 역할을 할 기술이라고 믿었고, SK가 메모리 기술을 확보하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도 했다.
2016년 신년하례회에서 최 회장은 경영복귀 후 그룹 창업 이래 최초로 영업이익 10조원을 경신한 데 대해 임직원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2015년 8월 광복절 특사로 나온 직후의 첫 신년회였다. 이후 10년간의 변화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2012년 2월 15일 최태원 회장(맨 오른쪽)이 하이닉스 임시주총과 이사회 등 인수작업을 마무리한 후 찾은 이천공장 구내식당에서 작업복차림으로 임직원들과 점심식사를 하며 "하이닉스가 행복할 때까지 뛰겠다"면서 "하이닉스는 SK뿐 아니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격려했다. /제공=SK
◇'서든 데스'부터 '딥체인지'까지… 리밸런싱은 통했다 최태원 회장이 최초로 '서든 데스'라는 말을 쓰며 그룹의 위기를 얘기한 건 10년 전인 2016년이다. 다운사이클에 접어든 SK하이닉스를 우려한 게 시작이었고, 끝내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과 위원장 등을 전면 교체하며 쇄신했다. 이른 바 '딥 체인지'다.
다시 '서든 데스'를 꺼내는 건 2023년 파리에서다. 2016년 하이닉스의 부진을 에너지·화학이 만회했다면 2023년은 두 축이 함께 무너진 해다. 하이닉스는 7조원 규모 천문학적 적자를 냈고 그룹의 또 다른 축인 SK이노베이션마저 반토막 난 성적표를 내놨다. 4분기는 끝내 적자를 면치 못했다.
문제는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던 야심작 배터리사업(현 SK온)의 손실이 눈덩이처럼 커졌다는 데 있다. 2023년 5000억원 규모 손실은 이듬해 조 단위로 번졌다. 2024년 '전기차 캐즘'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고공행진하던 전기차 성장이 더뎌진 걸 비유한 말이다. 대규모 배터리 투자에 나섰던 SK의 소위 '리밸런싱'이 본격화한 배경이다.
이윽고 2024년 최 회장은 신년사에서 느슨해진 거문고는 줄을 풀어내어 다시 팽팽하게 고쳐 매야 바른 음을 낼 수 있다며 '해현경장(解弦更張)'의 자세를 요구했다. 경영시스템을 점검하고 다듬어 나가자고 했고 경영환경이 녹록지 않으니 스스로 내실을 갖추는 계기로 삼아달라고도 했다.
사촌동생 최창원 부회장을 수펙스협의회 의장으로 삼아 리밸런싱의 수장에 앉힌 것도 그해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2024년 219개였던 SK그룹 계열사는 올 5월 1일 기준 151개까지 다이어트했다. 지분 매각과 합병으로 총 68개사를 줄였고 감축폭은 31%에 달한다.
SK스페셜티, 바이오팜의 지분과 SK이노베이션의 보령LNG터미털, 코원에너지서비스 사옥 부지 등을 팔았다. SK이노베이션과 SK E&S가 합병했고 SK온과 SK엔텀이 합쳤다. SK에코플랜트는 환경 관련 자회사를 대거 지워냈다. 리밸런싱은 합격점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속도감 있게 현재 진행형이다. SK실트론 지분을 대거 두산에 매각하기로 했고 SK이노베이션은 자회사 SK IET를 흡수 합병 절차 중이다.
올해 신년사에서 최 회장은 리밸런싱의 성과를 자평했다. 최 회장은 "불확실한 경영환경 속에서도 SK그룹은 더 멀리, 더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단단한 기초체력을 다시 회복하고 있다"면서 포트폴리오 리밸런싱과 운영개선을 통해 내실을 다져온 구성원들의 노력과 헌신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러면서 "AI를 중심으로 글로벌 산업 판도와 사업 구조가 재편되는 격동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가운데, AI는 이미 우리 일상 깊숙이 들어온 현실이 됐다"면서 "메모리, ICT, 에너지솔루션, 배터리와 이를 잇는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SK가 수십 년간 묵묵히 걸어온 길은 결국 오늘의 AI 시대를 준비해 온 여정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룹 미래를 건 또 다른 도전의 시작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왼쪽)이 젠슨 황 엔비디아CEO와 지난 6월 2일 컴퓨텍스 2026 행사장 내 꾸려진 SK하이닉스 부스를 찾았다. /제공=SK하이닉스
◇다시 10년 대계… 'AI 풀스택'에 그룹 명운 걸었다 반도체로 동분서주하던 최 회장이 6월 이후 그룹의 비전을 두 차례 행보에서 명확히 했다. 그룹 전 계열사가 급변하는 AI 생태계에 바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게 골자다.
6월 뉴 이천포럼에서 "360도 전방위로, 전속력으로 AI 전환에 돌입해야 할 때"라며 강하게 드라이브 걸었고 3개월 만인 9월엔 울산 현장을 찾았다. 계열사 CEO 7 명이 총출동한 자리에서 "AI 인프라의 상징인 SK AI데이터센터 울산과 그 AI를 실제 생산에서 구현해 내는 SK이노베이션 울산CLX가 결국 하나로 이어져야 SK가 지향하는 'AI 풀스택 프로바이더'가 완성된다"고 했다.
울산 데이터센터는 AWS와 함께 약 7조원을 투입해 2027년 말 가동이 목표이고, 전국 15GW AI 인프라의 첫 사업지다. 11일 울산포럼에서는 울산은 900㎿까지 다 왔다며 글로벌 빅테크들을 계속 만나고 있고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2024년부터 본격화한 리밸런싱은 구조조정이 아니라 AI 밸류체인 재배치로 이어진 셈이다. 그 과정에서 SK텔레콤은 AI 인프라 설계자로서 역할을 한다. 데이터센터의 설계와 구축, 운영을 총괄하고 15GW 로드맵을 꾸려나가야 한다. 포화 상태인 국내 통신시장을 벗고 확실한 미래 먹거리 사업을 펴게 된 셈이다. 새롭게 출범한 SK하이퍼와 SK호라이즌이 돕는다.
SK하이닉스는 HBM 공급이 기본 역할이다. 그룹이 데이터센터를 지으면서 SK는 엔비디아에 HBM을 파는 공급자인 동시에, 엔비디아 GPU를 사들이는 수요자 지위까지 갖게 된다. 협상 구도가 달라진다는 분석도 업계에서 나온다. SK브로드밴드는 망과 운영, SK AX는 시스템 통합에 나설 예정이다.
SK에코플랜트는 울산 AI 데이터센터의 설계·시공을 맡아 건축과 전력·통신·냉각 기반시설 구축을 담당한다. 리밸런싱 과정에서 계열사를 대거 덜어냈지만, 이들이 인프라 주역으로 다시 자리한 셈이다. SK가스 등은 울산 데이터센터에 발전소를 통해 전력을 공급하고 LNG 냉열까지 활용한다. 데이터센터의 최대 병목이 전력이라는 점에서, 정유·에너지가 뿌리인 그룹이 가진 구조적 이점이다.
SK이노베이션은 자회사 SK엔무브와 함께 데이터센터 열관리·냉각 기술을 개발한다. 윤활유업계 국내 1위인 SK엔무브가 액침냉각 플루이드로 새 먹거리를 찾아냈다. 최 회장이 신년사에서 말한 "SK가 잘해왔던 사업의 본질을 단단히 다지고 그 위에 AI라는 혁신을 입힌다"의 가장 구체적인 실물이다. 이노베이션은 또 AX 전환 컨설팅 사업까지 병행키로 했다. 향후 제조업 강국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중요한 기술이다.
재계 관계자는 "최 회장이 수년 전부터 AI와 에너지 등을 묶어 얘기할 때만 해도 막연하게 들렸지만 지금은 그룹의 핵심사업 구조가 되고 있지 않느냐"면서 "반도체부터 데이터센터, 전력·냉각까지 한 그룹 안에서 다 되는 곳은 국내에선 SK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에너지·화학, 통신 등 한계사업을 AI 생태계 인프라로 매끄럽게 연결시키는 최 회장 특유의 비전형 리더십이 10년의 과정을 거쳐 성공에 안착할지 주목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