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Advertisements

[윤일현의 문향세담]이 가을, 조금 더 가슴으로 살아도 좋다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ww2.asiatoday.co.kr/kn/view.php?key=20260920010007346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6. 09. 20. 17:47

구글 검색 선호 출처 추가 Google 검색에서 아시아투데이 기사를 더 자주 볼 수 있습니다.

Advertisements

Advertisements

2026082301001354300074101
윤일현 (시인·교육평론가)

아침저녁으로 바람의 결이 달라졌다. 한낮의 햇살은 아직 따갑지만, 아침저녁은 제법 서늘하다. 계절이 바뀌면 마음도 지나온 시간을 돌아본다. 무엇을 더 이루어야 하는가보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를 묻게 된다. 뜨거운 여름을 지나온 몸과 마음이 속도를 늦추고 싶은 때다.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우리에게 '지와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더 친숙한 이 작품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이야기다. 나르치스는 사색과 절제, 질서와 정신을 중시한다. 그는 수도원 안에서 자신을 닦으며 세계를 이해하려 한다. 반면 골드문트는 감각과 사랑, 방랑과 예술의 인간이다. 그는 수도원 밖으로 나가 길을 걷고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며 세상을 몸으로 경험한다.

얼핏 보면 둘은 정반대의 삶을 산다. 한 사람은 머리로 세계를 이해하고, 다른 한 사람은 가슴과 몸으로 세계를 받아들인다. 헤세는 어느 한쪽이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없는 것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더 깊이 이해한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에게 말한다. "우리는 태양과 달이고, 바다와 육지다." 서로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 속에서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한다는 뜻이다. 이 말에는 '지와 사랑' 전체를 관통하는 정신이 담겨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함께 품고 살아간다.

생각하고 판단하며 절제하는 자신이 있는가 하면, 문득 모든 계산을 내려놓고 길을 떠나고 싶어 하는 또 하나의 자신도 있다. 삶이 힘든 까닭은 둘 가운데 하나를 너무 오래 억누른 채 살아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부분 나르치스처럼 살아간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시간을 나누고, 약속을 지키고, 맡은 책임을 다한다. 얼마나 효율적으로 일했는지, 무엇을 이루었는지, 다른 사람보다 뒤처지지 않았는지를 확인하며 하루를 보낸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삶에는 질서가 필요하고 책임에는 무게가 있다. 그러나 너무 오래 그렇게만 살다 보면 삶이 잘 정돈되어 있는데도 마음은 메말라 있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다. 하루는 빈틈없이 채워져 있는데 무엇을 위해 이렇게 서둘러 왔는지 알 수 없고,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도 한 사람의 얼굴을 오래 바라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삶을 관리하는 데는 익숙해졌지만 삶을 느끼는 능력은 무뎌질 수 있다.

골드문트가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은 그 잃어버린 감각이다. 그는 길을 걷고 숲을 지나며 사람을 사랑한다.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기고, 이별에 아파하며, 죽음과 고통을 목격한다.

그의 삶은 편안하지 않다. 방랑은 낭만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사랑에는 상실의 그림자가 따라다닌다. 그는 그 모든 것을 피하지 않고 자기 몸으로 통과한다. 그래서 그의 예술에는 살아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이가 있다.

골드문트는 끔찍한 현실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이 이토록 덧없고 죽음과 공포로 가득 차 있기에, 나는 더욱더 덧없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기대고 위로를 찾는다"라고 고백한다. 세상이 아름다워서 꽃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죽음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놓지 않으려는 태도다. 삶에 지친 사람에게 예술과 사랑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들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없애주지는 않지만, 현실을 견딜 마음의 자리를 만들어 준다.

우리에게는 그런 틈이 필요하다. 모든 시간이 유용할 필요는 없다. 삶에는 목적과 성과로 환산되지 않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무용한 순간에 마음은 숨을 고르고,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는다. 골드문트의 방랑과 예술은 삶의 쓸모 바깥에도 인간을 살게 하는 소중한 가치가 있음을 보여준다.


가을은 마음의 방향을 안쪽으로 돌려세우는 계절이다. 여름이 우리를 바깥의 열기 속에서 견디고 버티게 했다면, 가을은 낮아진 빛과 서늘한 바람으로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게 한다. 무엇을 더 이루어야 하는가보다 지금 내 삶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를 묻게 한다. 나이가 들수록 나르치스의 지혜와 골드문트의 사랑이 모두 필요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생각만으로는 삶을 다 이해할 수 없고, 감정만으로도 삶을 감당할 수 없다. 이성과 감성, 절제와 열정, 머리와 가슴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우러질 때 비로소 한 사람의 삶을 온전하게 만든다. 너무 오래 머리로만 버텨왔다면 이번 가을에는 마음의 속도를 늦추고 조금 더 가슴 쪽으로 걸어가도 좋다. 계절이 바뀌는 순간은 익숙한 삶의 방향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조용한 전환점이다. 가을은 바깥 풍경과 함께 우리 마음의 자세도 조금씩 바꾸어 놓는다.


‘지와 사랑’에서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의 치열했던 삶을 돌아보며 흔들림 없는 평정만으로는 삶의 온전함에 이를 수 없음을 깨닫는다. 우리가 찾는 평안도 그렇다. 모든 불안과 문제가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찾아오는 완벽한 안식이 아니라, 흔들리는 하루 속에서 잊고 있던 작은 감각 하나를 다시 붙들며 날마다 새롭게 찾아가는 것이다. 


가을은 우리에게 무엇을 더 가지라고 재촉하지 않는다. 조금 덜어내고, 천천히 바라보고, 오래 잊고 있던 마음의 소리를 들으라고 말한다. 삶은 이해하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바라보고, 사랑하고, 아파하고, 그리워하는 동안 한 사람의 생은 깊어진다. 이 가을, 골드문트의 길을 생각한다. 때로는 길을 잃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자리에서 벗어나 가슴으로 걷는 일이 우리를 다시 삶의 중심으로 데려온다. 그곳에서 우리는 오래 잊고 있던 자기 얼굴과 비로소 마주한다.


/시인·교육평론가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