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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동해 연필뮤지엄 앉자, 묵호의 과거-미래 동시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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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두완 기자

승인 : 2026. 09. 09.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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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해병들이 아이들 가르치던 일심학교 터엔
이젠 수많은 이들의 글씨와 스케치로 빼곡한 공간
연필보다 스마트폰-AI 먼저 찾는 시대이지만
그래도 연필 끝은 우리의 미래 가르키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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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시 연필뮤지엄 안내소에 설치된 연필설치미술./부두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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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로 그린 캐리커쳐들. 국내외 유명 인사들의 다양한 표정이 살아 있다.
동해 묵호역을 나오며 동호마을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관광객들이 주로 가는 묵호항는 다른 방향이다. 철길 건너 낮은 언덕을 바라보면 집과 골목 사이로 연필뮤지엄이 모습을 드러낸다. 걸어서 5분 남짓한 이 길 위로 동호마을의 오랜 시간이 포개져 있다.

책을 빌려 읽던 주민들의 기억, 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가지 못했던 청소년들을 가르친 해군 장병들, 아이들이 꿈을 키우는 발한도서관까지. 동호마을은 바다를 끼고 있지만 바다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곳엔 유난히 책과 학교, 배움에 관한 이야기가 깊게 얽혀 있다.

'검은 바다' 묵호에서 만난 연필

먹 '묵(墨)'에 호수 '호(湖)'를 쓰는 묵호는 검은 바다다. 흰 종이 위에 검은 흔적을 남기는 연필과 묘하게 닮았다. 동해 최초이자 국내 최초의 연필 전문 박물관이 이곳에 들어선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연필뮤지엄은 이인기 대표가 30년 넘게 세계 100여 개국을 다니며 수집한 연필을 모태로 구성했다. 세계 각국의 연필 3000여 종을 비롯해 연필의 역사, 제작 과정, 브랜드와 예술성이 담긴 연필들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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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시민들이 전시장에 메모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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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화가 곱게 핀 카페 테라스.
전시장에 들어서자 계단 벽면을 가득 채운 형형색색의 메모지가 시선을 잡는다. 관람객들이 연필로 남긴 추억과 소망이다. "다시는 만날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너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많았구나."
어느 관람객의 문장 앞에 발걸음이 멈췄다. 디지털 화면의 글자는 쉽게 삭제되지만, 종이에 눌러쓴 글에는 그날의 힘과 떨림, 한 사람의 시간이 고스란히 남는다.

이 대표는 동해시 대표 관광 캐릭터 '해별이와 친구들'을 만든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연필이 개인의 생각을 기록한다면, 캐릭터는 도시의 정체성을 기록한다. '무엇을 남기고 어떻게 기억하게 할 것인가.' 두 작업은 결국 같은 질문에서 출발한다.

카페 테라스에 앉자 마을과 바가가 한눈에 들어왔다
박물관 3층, 해당화가 곱게 핀 카페 테라스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탁 트인 창밖으로 논골담길과 묵호항의 전경이 훤히 들어오는 '뷰 맛집'이다. 발아래로는 묵호역과 길게 이어진 철길이 내려다보이고, 그 주변으로 동호 바닷가책방마을과 발한도서관이 골목 사이마다 자리 잡고 있다. 한쪽에는 탁 트인 바다와 논골담길이, 다른 한쪽에는 책과 연필, 옛 학교의 기억이 공존한다.

특히 이곳은 옛 일심학교의 역사를 품고 있다. 일심학교는 1964년 해군 권세춘 중사가 집에서 야학을 열며 시작됐다. 이후 해군 제1함대의 전신인 묵호경비부와 지역사회가 뜻을 모아 1967년 일심중학교를, 1975년 고등학교 과정을 신설했다. 1980년대까지 총 859명의 배움터가 되어준 곳이다.

건물은 사라졌지만, 해군 장병들이 밝힌 배움의 불씨는 마을의 역사로 남았다. 테라스에서 내려다본 책방마을과 도서관, 옛 학교 터는 각각 떨어진 장소가 아니라 하나의 교육문화 축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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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테라스에서 묵호역과 묵호항, 논골담길과 이어진 바다가 한눈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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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장관 등 유명한 작가들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모든 작품에서 연필의 힘이 느껴진다.
AI 시대, 마을 전체를 교과서로 만들자
요즘 아이들은 연필보다 스마트폰을 먼저 잡고, AI로 글과 그림을 만든다. 하지만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아이가 살아가는 마을의 기억과 정서까지 대신 만들어줄 수는 없다. 골목을 직접 걷고, 사라진 학교의 역사를 찾아 연필로 기록하는 경험은 사람이 직접 만들어야 한다.

사단법인 한국인성창의융합회 교수단이 단체로 연필뮤지엄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이곳에서 나눈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동해시와 동해교육지원청, 지역 학교들이 이 공간들을 하나로 묶은 정규 교육과정을 개발하자는 것이다. 초등생은 연필을 들고 마을을 그리며 '나의 동네'를 기록하고, 중학생은 일심학교 졸업생을 인터뷰하며, 고등학생은 마을의 역사로 새로운 캐릭터와 콘텐츠를 기획하는 식이다.

교수들은 이곳이 H-STEAM 설치미술을 통한 창업과 진로체험 장소로 최고의 공간이라고 입을 모았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경험에 비춰 보면, 교육은 지식 전달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아이가 직접 현장을 찾고 자신의 언어로 표현할 때 비로소 본인의 것이 된다.

카페 테라스를 내려와 메모 벽 앞에 다시 섰다. 과거엔 해군이 식당을 내어주며 아이들의 배움을 지켰다면, 이제는 지역사회가 그 뜻을 이어간다. 빈 종이와 연필 한 자루를 든 아이들에게 물음을 던지고 싶다. "테라스 너머로 바라본 너희의 동호마을과 묵호 바다는 어떤 모습이니?" 아이들이 연필을 잡는 순간, 옛 일심학교에서 시작된 배움의 불씨는 다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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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호역 사거리에서 동호마을을 바라보면 연필뮤지엄이 보인다. 올라가는 골목은 요즘 여행자가 많이 찾는 곳이다.
부두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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