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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를 후벼파고 무리한 해석을 해서라도 근대화의 싹과 실학을 찾아내려는 심리 속에는 식민지 백성의 열등 콤플렉스가 있고, 강자 앞에서 뭔가를 과시하려는 약자의 서글픈 욕망이 있다. 1인당 국민소득뿐만 아니라 1인당 총수출액까지 일본을 넘어선 오늘날, 이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봐도 될 법한데, 그게 쉽지 않은 듯하다. 국사학자들이 아직도 식민지 백성으로 혹은 후진국 국민으로 살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국사학자들의 지적 수준이 21세기 대한민국의 자부심에 미치지 못할 때에는 국민이 먼저 물어보아야 한다. 과연 조선 후기에 근대화를 스스로 만들 정도로 인간의 욕망이 긍정되고 상공업이 발전하고 도시화가 이루어졌던가, 오늘날 선진 대한민국은 조선 후기 근대화의 싹에서 자라난 그런 나라인가.
조선은 시종일관 주자학의 가르침에 충실한 종족 단위의 폐쇄적이고 가난한 농업사회였고, 후기로 갈수록 더 그랬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답은 뻔하다. 조선 후기엔 근대화의 싹도 없었고, 실학도 없었다. 주자학과 양반의 나라였던 조선을 부정하는 가운데 근대화가 이루어지고 대한민국이 발전했다. 조선과 대한민국 사이에는 근본적 불연속성이 가로놓여 있다.
국사학자들은 잘 모르지만, 주자학의 가장 근본적인 믿음은 인간의 작위는 나쁘고 무위자연은 좋다는 믿음이다. 입증 불가능한 이 믿음에 따라 조선의 양반 주자학자들은 500년 내내 시끄러운 인간 세상을 떠나 꽃 피고 새 우는 고요한 자연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들이 남긴 어마어마한 분량의 한시 대부분은 자연으로의 회귀를 지겹도록 노래한다.
그렇다고 세상 다 때려치우고 산속으로 달아날 수도 없었다.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효제와 삼강오륜을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자연회귀 의지를 버리지 못하다 보니, 인간과 자연이 교차하는 사이쯤에서 농업을 기반으로 부계 중심의 종족을 이루고 동성마을을 형성하며 살았다.
이런 경향은 임란 이후 갈수록 심해졌으니, 인구 20만 정도의 행정중심지 서울의 분주함 외에는 근대화로 이어질 만한 상공업 발전도 없었고 근대화를 지향하는 실학도 없었다. 유교와 주자학을 벗어난 진짜 실학은 천주교의 도래로부터 시작해 개화파 이후에야 비로소 등장한다. 저 유명한 정약용이라든가 박지원과 같은 이른바 실학자들의 학문에는 두 가지 치명적인 한계가 있었다.
첫째 결함은 그 어떤 실학자도 유교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아버지의 말씀에 대한 무조건적 순종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 윤리는 그들에게도 신성불가침이었다. 남인 정약용은 노론의 골수 주자학자들보다 효(孝)를 더 강조했다. 노론 핵심 가문 출신의 박지원은 해체주의적인 사유와 화려한 문장력을 자랑했지만 유교 윤리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유교가 '중국산 이데올로기(ideology made in China)'임을 알지 못했다. 공자와 맹자가 다 중국 사람이고 사서삼경이 다 중국 책이므로 유교는 중국산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 유교를 보편적 진리로 착각하고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중화주의에 오염되었다.
지구는 둥글고 모든 나라가 중심이라면 세계에는 중심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중화주의는 세계의 진리일 수 없고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박지원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의 모든 교양과 자부심은 중국에서 왔고, 정약용 또한 다르지 않았다.
중국이 세계의 중심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버지 또한 세상의 중심일 수 없다. 집안의 질서와 집밖의 질서가 다른데도 아버지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는 효를 최고의 보편적 가치로 높이는 유교는 진리가 아니고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중국산 이데올로기'로서의 유교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인간의 욕망과 세계의 실제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므로 어떤 학문도 실학일 수 없다.
둘째 결함은 이른바 실학자들이 조선의 빈곤과 부패에 대해 개탄하면서도 아무도 목숨 걸고 궐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의 실학은 행동이 없는 탁상공론에 불과했다. 그들의 탁상공론이 얼마나 실효성 있는 이론인지 의문스럽기도 하지만 용기의 부재야말로 더욱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둘째 결함은 첫째 결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효의 실천을 최고로 여기는 유교의 가르침에 따르자면 대의를 위해 목숨 걸고 일어서기는 어렵다. 유교를 버리고 중국을 버려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대의를 위해 목숨 걸고 일어설 수 있다.
같은 시대 일본의 젊은 사무라이들은 일본의 미래를 위해 새로운 학문을 탐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죽음을 불사했다. 바로 이것이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정반대로 갈라놓았다.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공자와 맹자의 유교가 '중국산 이데올로기'에 불과함을 잘 알았기에 유교와 중국을 우습게 알고 일찌감치 서양 학문을 받아들이고 근대화를 위해 목숨 걸고 일어섰다.
19세기 말 김옥균, 유길준, 이승만 등 개화파 지식인들은 우리보다 먼저 개화에 성공한 일본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을 가졌지만, 조선 후기 이른바 실학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실학이 개화사상으로 이어진다는 국사학자들의 오래된 주장은 허구에 불과하다. 유교와 중국을 부정하는 개화 즉 근대화는 서양에서 온 박래품이었다.
가장 급진적인 개화사상가 이승만은 20대의 젊은 나이에 개화는 유교와 주자학과 중국을 버려야 가능하다는 확신을 지녔다. 이승만은 중국 것을 다 버리고 미국 것을 받아들이려 했다. 그는 미국의 기독교까지 받아들였다. 유교와 중국을 부정해야 실학이 가능하다면 진짜 실학은 이승만에서 시작된 게 아닐까. 이승만에 앞서 굳이 실학의 원조를 조선에서 찾는다면 서애 류성룡이 있을 뿐이다.
최진덕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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