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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중국보다 중국적인 조선의 불행과 서애가 흘린 피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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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12. 23.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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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덕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한나라 무제(재위 BC141~87) 이후 신해혁명(1911)에 이르기까지 무려 2000년 넘게 중국문명의 핵심에는 늘 유교가 있었다. 불교나 도교가 성행하더라도 그것은 민간의 일일 뿐, 국가권력은 반드시 과거시험에 합격한 유학자 관료들의 수중에 있었다. 왕조가 바뀌더라도 지배 이데올로기는 변함없이 유교였다.

◇유교와 한문에 근거한 중화주의, 유교적 국제관계인 조공책봉 체제 만들어

유교의 형성 과정은 중국문명의 언어적 기초가 되는 한문의 형성 과정과 불가분하게 겹친다. 은주시대 갑골문이나 동기명의 각종 왕실기록을 정리한 것이 서경이 되고, 같은 시대 왕실과 민간의 각종 노래를 수집 정리한 것이 시경이 된다. 시경과 서경이 형성되면서 한문이 형성되고 유교가 형성된다. 공자도 시경과 서경을 교재로 삼아 "배우고 때때로 익혔다(學而時習)."

한대 이후에는 공자가 산정했다고 전해지는 오경(五經)이 한문의 표준이 되었고, 송대 이후에는 주희에 의해 확정된 사서(四書)가 한문의 표준이 되었다. 한문을 제대로 구사하려면 누구라도 사서오경의 한문을 읽고 외워야 했다. 유교가 한문의 시니피에라면 한문은 유교의 시니피앙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유교와 한문은 밀접하다.

유교와 한문은 중화문명의 꽃 즉 '중화(中華)'였다. 중국은 유교와 한문을 근거로 그것들을 갖지 못한 주변의 다른 민족들을 모두 오랑캐 즉 '이적(夷狄)'으로 보고 그들을 멸시했다. 유교와 한문 속에 이미 중화주의가 배태되어 있었다. 공자와 맹자는 중화와 이적을 구별하는 발언을 했고, 그들의 발언은 경서 속에 한문으로 분명하게 적혀 있다.

유교와 한문에 근거한 중화주의는 유교적 국제관계라 할 수 있는 조공책봉 체제를 만들어냈다. 주대의 봉건제를 국제적으로 확대한 조공책봉 체제는 중국의 힘이 강할 때에만 유지될 수 있었다. 중국의 힘이 약해지면 오랑캐가 중국을 침략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 가운데 이민족 왕조가 절반에 가깝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제관계의 진리는 힘이다. 중국의 유교와 한문은 국제관계 속에서 중국 자신을 지키는 데도 그다지 유용하지 않았다.

◇오직 '조선'만이 중국의 멸시에도 중국을 정신적 조국으로 여겨

그러나 중국의 주변국들 중에는 유교에 너무 철저하고 한문을 너무 숭상하고 조공책봉 체제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국제관계의 진리를 무시하고 심지어 자국의 이익까지 무시하면서, 마치 자식이 부모를 섬기듯 진심으로 중국을 섬긴, 착해도 너무 착한 이상한 나라가 하나 있었다. 그 나라는 중국이 오랑캐로 멸시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중국을 자신의 정신적 조국으로 여겼다. 그 나라가 바로 우리 조상들의 나라 '조선'이었다.

조선은 유교 가운데 송대 신유학의 일종인 주자학을 받아들여 오직 그것만을 숭배하면서 삼국시대 이래 불교 전통을 깡그리 없애버렸다. 국리민복을 위해 불교와 주자학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좋은지 따져보지 않고 무조건 중화주의를 진리로 선택하고는 주자학의 가르침에 따라 강압적으로 나라를 바꾸었다.

불교를 그렇게 철저히 탄압하면서 유교 내지 주자학을 받아들인 나라는 조선뿐이었다. 베트남도 유교 내지 주자학을 받아들였지만 불교를 탄압하지 않았다. 티베트와 일본은 예나 지금이나 유교와는별 관계 없는 불교국가다. 몽고와 만주에도 불교가 성행했다. 심지어 명청시대 중국에도 민간에는 불교가 널리 퍼져 있었다. 조선만큼 불교를 철저히 탄압하고 주자학을 철저히 숭배한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중국 주변국들 가운데 중국을 천하의 중심, 문명의 중심으로 숭배했던 나라도 실은 조선뿐이었다. 일본은 자국을 중국이라 부르고 중국을 서국(西國)이라 불렀다. 몽골은 초원 위의 하늘(텡그리)을 숭배했지 중국에 주눅 들지 않았다. 티베트는 불교전통에 철저했기에 중국문명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베트남은 유교와 한문과 조공책봉 체제를 받아들이면서도 스스로 황제국이라 칭했다.

◇조선의 주자학자들, 한글을 언문으로 낮추고 한문을 진서로 높여

15세기에 세종대왕은 주자학을 배운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글이라는 대단히 효율적인 문자체계를 만들어놓았지만, 조선의 주자학자들은 한글을 언문이라 낮추고 한문을 진서로 높였다. 소통의 수단으로 쓰기에는 너무 어려운 한문을 진서로 높인다고 해서 국리민복에 무슨 도움이 될지 그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한문만 고집했다.

그리하여 한문은 거의 모든 백성을 문맹 상태에 몰아넣은 채 아는 게 주자학밖에 없는 사대부 지식인들의 권력이 되었다. 한문지식이 곧 권력임을 누구나 알았지만 한문은 배우기 힘든 문자였다. 한문을 배우느라 조선의 양반 남자들은 청춘의 에너지를 다 소모해야 했다. 조선이 활기를 잃고 침체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 가운데 하나가 한문숭배에 있었다.

티베트는 7세기에 자국문자를 만들어 지금까지 쓰고 있다. 일본은 9세기에 가나문자를 만들어 지금까지 한자와 함께 쓰고 있다. 베트남은 10세기 내지 13세기 쯤에 자국문자를 만들었다. 여진은 12세기 초에, 몽골은 13세기 초에 자국문자를 만들었다. 세종대왕의 한글창제는 중국 주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상당히 늦은 셈이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얼마나 덜 자주적이고 얼마나 덜 실용적인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

◇임진왜란 때 '부모의 나라' 명으로 망명하려던 선조를 막아선 서애 류성룡

조선이 1392년 개국하고 꼭 200년 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선조의 등극(1567)과 더불어 사림파 골수 주자학자들의 집권이 확정되었다. 그 후 한 세대도 안 돼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불과 20일 만에 서울이 무너지고, 선조는 백성을 버리고 북으로 달아났다. 선조는 압록강 넘어 명나라로 망명하고자 했다. 명나라는 "부모의 나라"니 망명해도 된다는 것이 선조의 논리였다. 압록강을 넘는 순간 조선은 남의 나라가 된다는 말로 선조의 망명 의지를 꺾은 것은 서애 류성룡이었다.

조선은 중국에 출병을 요청했다. 중국은 조선이 혹시 일본과 한통속이 아닌지 의심하면서 출병을 망설였다. 전쟁 발발 8개월이 지나서야 명군이 왔지만 싸우려 하지 않았고 처음부터 일본과의 강화에 열을 올렸다. 중국은 조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출병했다. 조선은 명군을 위해 군량을 조달하느라 골병이 들고 있는 한편, 명군은 도처에서 왜군보다 더 심하게 민폐를 끼치고 있었다. 명군이 없으면 왜군을 물리칠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나 서애는 "명군을 믿을 수 없음이 분명하다"고 선조에게 말한다.

◇임진왜란 참극의 결정적 원인은 부국강병을 금기시한 조선의 주자학화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임진왜란으로 인구 4분의 1 정도는 사라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본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도 수십만 명이었다. 이 참극의 결정적 원인은 조선이 유교화 내지 주자학화 되어 중국보다 더 중국적인 나라가 된 데에 있었다. 유교 내지 주자학은 부국강병을 금기시했다. 그리고 한문을 잘하는 문신만을 높이고 무사나 상인을 경멸했다. 조선은 부국강병과는 정반대의 길로만 달려갔으니 일본의 무력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은 실은 자업자득이었다.

애당초 조선은 유교와 한문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문명을 배우지 말았어야 했다. 불교를 버리고 주자학을 선택한 여말선초의 정몽주나 정도전과 같은 주자학자들은 국리민복의 현실을 도외시하고 원말 명초 중국 주자학자들의 선택을 따랐다. 조선의 주자학자들은 국리민복을 위해 불교와 같은 종교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고, 또 시장에서의 상업활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다. 그들의 선택은 비자주적이고 비실용적이고 너무 이념적이고 천박했다.

◇일본과 미국으로부터의 문명 수입이 조선조 500년 불행을 끝내

그들의 어리석은 선택으로 인한 조선조 500년의 침체와 불행을 끝낸 것은 조선 자신이 아니고 일본과 미국이었다. 20세기 이후 문명 수입의 루트는 중국 대륙에서 바다 건너 일본과 미국으로 바뀌었다. 이 같은 문명사적 대전환이 우리에게 자유와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중국이 14억 인구와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경제력과 군사력을 키우자 다시 중국으로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이 많다.

중국이 패권국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국리민복을 위해 냉철하게 손익을 따져봐야 한다. 그런데 막연히 반미 반일 감정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친중 쪽으로 기우는 사람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 이 사람들은 현실과 실리보다 이념과 명분을 앞세워 중화사대주의를 외치던 조선의 주자학자들과 조금도 다를 게 없다.

◇ 국제관계의 진리는 오직 '힘(勢)'뿐임을 절감했던 서애가 흘린 피눈물, 잊지 말아야

서애 류성룡은 중국의 배신에 치를 떨면서 국제관계의 진리는 오직 '힘(勢)'뿐이라고 선조에게 실토한 바 있다. 주자학자라면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었다. 일국의 전시(戰時) 재상이었던 류성룡은 군량을 제때 조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명나라 장수 이여송 앞으로 끌려가 무릎을 꿇고 꾸지람을 듣다가 자신도 모르게 서럽게 울었던 적도 있다. 류성룡이 흘린 피눈물을 기억해야 한다. 조선의 현실과 실리보다 주자학에서 배운 이념과 명분을 더 앞세우면서 중화주의에 매몰되었던 우리 조상들의 잘못을 21세기에 다시 반복하다가는 무슨 참화를 겪을지 모른다.

최진덕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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