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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현의 文香世談] 속도의 시대, 방향을 묻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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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12. 21.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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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현 시인·교육평론가
세모(歲暮)의 거리를 걷다 문득 묻는다.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항해하고 있는가. 우리 배는 안전한가. 세계 곳곳에서 전쟁의 포성은 끊이지 않고, 기술 패권의 파고는 갈수록 거세진다. 인공지능과 첨단 산업이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지만, 그 변화의 속도는 인간의 감당 능력을 시험하는 압박으로 다가온다. 기후 위기는 예고를 넘어 잔혹한 현실이 됐고, 돌봄의 균열과 불평등은 사회 곳곳에 깊은 흉터를 남겼다. 이러한 위기의 징후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자본과 기술, 강력한 지도력만 있다면 모든 난관을 돌파할 수 있다고 맹신한다. 효율과 속도만을 앞세운 '불도저식 태도' 역시 여전하다.

성찰 없는 기술 경쟁과 군비 확장, 무분별한 자원 낭비는 인류의 앞날에 짙은 먹구름을 드리운다. 우리가 오직 '조금 더 빨리, 더 많이'라는 효율만을 외치는 사이, 항해의 진정한 목적지가 어디이며 이 전진이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묻는 근원적인 목소리는 소멸하고 있다. 거대 자본과 결합한 기술은 이제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그 자체가 목적이 돼 질주하고, 우리는 그 거친 물살에 휩쓸려 인간다움이라는 가장 소중한 가치마저 망각하고 있다. 파멸을 향한 가속 페달을 밟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할 때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질문은 매우 단순하지만 엄중하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허먼 멜빌은 19세기 중반, 산업화와 팽창주의가 정점에 달했던 시대에 이미 이러한 파멸의 징후를 예견했다. 그의 걸작 '모비 딕'은 맹목적 집착이 어떻게 공동체를 붕괴시키는지를 보여주는 서늘한 경고장이다. 이야기는 청년 이스마엘의 고백으로 시작된다. 방황하던 그는 포경선 피쿼드호에 올라 작살잡이 퀴퀘그를 비롯한 다양한 인종의 선원들과 운명적 항해를 시작한다. 출항 후 모습을 드러낸 선장 에이허브는 흰고래에게 다리를 잃은 복수의 화신이었다. 그는 선원들에게 이윤이나 포경의 성공이 아닌, 오직 '모비 딕'과의 결전을 위해 목숨을 걸라고 선언한다.

흰고래 모비 딕은 단순한 포획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닿을 수 없는 자연의 신비이자, 끝내 이해할 수 없는 '숭고한 타자'의 상징이다. 이스마엘은 인류의 지식과 신화를 총동원해 그 실체를 탐구하지만, 결국 "그 어떤 해석도 이 거대한 존재를 하나의 의미로 가둘 수 없다"라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그러나 에이허브는 그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견디지 못한다. 그는 고래를 '악(惡)'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파괴해야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그 가슴속 깊은 악의 심장을 찌르고 말 것이다." 그 선언은 복수의 다짐이자, 공동체를 어둠으로 끌고 들어가는 파멸의 주문이었다.

에이허브는 신에게 도전하는 비극적 영웅처럼 보이지만, 그 길은 결국 자기파괴의 종착역으로 향한다. 그의 투쟁은 숙명에 맞선 인간의 의지처럼 비치기도 하나, 그 장엄함은 곧 파멸의 굴레가 된다. 그는 세계의 무심함에 반항하는 '존재론적 반항자'였으나, 그 반항은 공동체의 안녕을 제물로 삼는 독단적 개인주의로 변질된다.

피쿼드호는 더 이상 생계를 위한 상업선이 아니라, 선장의 광기를 위해 질주하는 난파선이 된다. 동료 선단(船團)의 조언도, 폭풍의 전조도, 선원들의 절박한 경고도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오늘의 세계는 또 다른 피쿼드호와 닮았다. 기술 혁신은 삶을 혁명적으로 바꾸지만, 이면에는 정보 유출과 일자리 상실, 존엄성 훼손이라는 불안이 도사린다. 기후 시계는 임계점을 넘어섰고, 고령화와 불평등은 사회적 균형을 위협한다. 청년들은 닫혀가는 기회의 문 앞에서 숨이 막히고, 국제 질서는 불안한 패권 경쟁으로 출렁인다.

이 혼돈 속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희망의 윤리'다. 희망은 막연한 낙관이 아니다.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것, 우리가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가 바로 희망이다.

멜빌의 세계는 '절대적 리더십'의 위험성을 고발한다. 확신만으로 조타륜을 쥔 에이허브는 고래와의 사투 끝에 배와 함께 침몰했다. 반면 이스마엘은 다른 길을 보여준다. 그는 세계의 복잡성을 회피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혼돈 속에서도 기록하고, 묻고, 타인의 흔적을 살피며 생존 부표를 붙잡고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그의 태도는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용기이자 진정한 윤리의 출발점이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는 없다'라는 겸손함 속에서 질문을 이어가는 것, 그것이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기술과 자본의 힘이 거대해질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힘의 크기가 아니라, 그 힘을 다스릴 '성찰의 윤리'다. 질문 없는 확신은 반드시 폭주로 귀결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한 명의 영웅적 결단이 아니라, 서로의 불완전함을 껴안는 공동체의 지혜다.

이스마엘처럼 세계의 모호함을 긍정하며 부단히 질문을 제기하는 태도야말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진정한 좌표다. 멜빌은 경고한다. "잘못된 항해는 모두를 가라앉힌다." 한 해를 보내며 우리는 되새겨야 한다. "우리의 피쿼드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조타륜은 누구의 손에 쥐어져 있는가?"

새해 태양이 떠오르기 전, 우리는 나침반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 항로의 방향은 외부의 파도가 아니라 우리 안의 성찰에서 결정된다. 이스마엘이 망망대해에서 생존의 이유를 건져 올렸듯, 우리도 서로의 이야기를 엮어 항해를 이어가야 한다. 희망은 바다와 맞서는 맹목적 힘이 아니라, 끝없이 다시 묻는 용기다. 그 질문이 멈추지 않는 한, 우리의 항해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윤일현 시인·교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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