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소극적 투자… 회사채 발행 늘려
정부 규제로 하반기 가계대출 반토막
銀, 실적 유지 위해 기업대출 확대 절실
금리 조정 등 경쟁력 강화 방안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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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상반기 국내 주요 대기업들이 은행에서 자금을 빌리기보다 기존 부채 상환에 집중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 침체 여파가 확산되는 데다 하반기에도 대내외 경영 환경의 불확실성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공격적 투자보다 재무 건전성 제고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여기에 회사채 시장에 활기가 돌면서 기업들의 직접 자금 조달이 늘고 있다. 연이은 기준금리 인하로 조달 환경이 우호적으로 바뀌고 있어, 은행 대출과 같은 간접 조달에 기대지 않고도 필요한 자금을 충당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흐름은 은행권의 고민을 더욱 깊게 만들고 있다. 정부의 대출 규제와 생산적 금융 기조로 인해 하반기 기업대출을 새 성장동력으로 점찍은 상황에서, 기업들이 차입금 상환에 주력하는 보수적 행보를 보이며 자금 수요가 줄어들 가능성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25일 금융권에 따르면 KB·신한·하나금융그룹의 올해 상반기 말 기준 상위 10대 주채무계열 대기업집단 신용공여액은 107조7603억원으로, 작년 말보다 5조3271억원 감소했다. 신용공여는 원화대출뿐 아니라 외화대출, 지급보증, 유가증권 등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빚'을 뜻한다. 이들 금융지주 3사는 금융기관 부채 규모가 큰 대기업 10곳의 신용공여액을 사업보고서를 통해 공시하고 있다.
그간 꾸준히 늘던 신용공여액이 줄어든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5대 대기업 집단 가운데 롯데를 제외한 삼성·SK·현대차·LG 모두 신용공여액이 감소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석유화학, 2차전지, 철강, 건설 등 주요 산업의 업황 부진이 대기업 그룹 전반의 침체를 초래했고, 이에 자금 수요가 감소한 것이 신용공여액 축소의 가장 큰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글로벌 경기 둔화와 중국발 공급 과잉, 관세 부담 등의 영향으로 올해 상반기 영업이익 상위 20대 기업 중 9곳이 전년 동기 대비 실적이 악화됐다.
여기에 기업들의 직접 자금 조달 확대도 영향을 미쳤다. 올해 상반기 일반 회사채 발행 규모는 37조8320억원으로, 반기 기준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두 차례 인하하면서 회사채 발행 여건이 개선된 덕분이다. 지난 22일 기준 AA- 등급 회사채의 금리는 2.932%로, 국고채 3년물과의 금리 차는 연초 0.66%포인트에서 이달 0.48%포인트까지 좁혀졌다. 국내 은행의 대기업대출 금리가 여전히 4%대에 머무는 가운데, 우량한 기업들은 은행보다 저렴한 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이에 은행들의 고심은 커지고 있다. 정부 규제로 하반기 가계대출 총량이 반토막 난 상황에서, 호실적을 유지하려면 기업대출 확대가 필수적이다. 주요 시중은행들은 기업대출을 월 1조원씩 늘리거나 연간 6~7% 성장을 목표로 세웠지만, 기업들의 차입 축소 기조가 이어진다면 목표 달성에 빨간불이 켜질 수밖에 없다.
특히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대기업대출 확보가 중요해졌다. 지난 5월 말 기준 국내은행의 중소기업대출 연체율은 0.95%로, 대기업대출 연체율(0.15%)의 6배 이상이다. 수익성 측면에선 금리가 높은 중소기업 대출을 취급하는 것이 유리하지만, 위험가중자산(RWA) 관리에 힘써야 하는 은행 입장에서는 리스크가 낮은 대기업대출의 확대가 필요한 상황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국내 대기업들이 대미 투자 확대, 노란봉투법 등으로 대규모 국내 투자를 유보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금 수요가 갑자기 급격하게 늘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은행들도 금리 조정, 금융·비금융 지원 확대 등을 통해 기업대출 경쟁력 강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