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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연의 오페라산책]국립오페라단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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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7. 01. 08:34

유쾌한 환상과 신랄한 풍자가 가득한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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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의 한 장면. /국립오페라단
근래 우리나라 오페라 무대에서 이토록 상상력이 풍부하고 독특한 작품을 만난 적이 있었나 싶다. 최근 국립오페라단이 한국 초연한 프로코피예프의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은 공연 내내 참신한 무대구성과 볼거리, 뛰어난 연주력으로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은 2017년 당시 대관령음악제에서 러시아 마린스키 오케스트라와 오페라극장이 콘서트오페라로 우리나라에 처음 선보였다. 그때는 러시아어로 공연을 했는데 별다른 무대 연출이 없는 콘서트 형식이라 이해하기가 어려웠고, 프로코피예프의 음악만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있다. 국립오페라단은 작곡가가 미국에서 초연했던 프랑스어 버전으로 무대에 올렸다.

이번 작품을 통해 오페라에서 연출가의 의도와 역량, 무대, 의상, 조명 디자이너, 성악가 등과 이뤄내는 유기적인 협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깨달았다. 연출을 맡은 로렌조 피오로니는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공간을 전방위로 활용해 유쾌한 환상과 신랄한 풍자가 가득한 무대를 선보였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무대와 의상, 조명 등도 적재적소에서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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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의 한 장면. /국립오페라단
무대디자이너 파울 졸러는 화려한 장식과 색채가 넘쳐나는 과장된 무대를 구성했다. 음침한 마법사들의 공간은 구소련의 연극적 전통을 연상시켰고, 왕자의 침실은 지나칠 정도로 번쩍거리는 금색을 도배해 왕실의 위엄을 우스꽝스럽게 풍자했다. 침실의 배경이 된 아르침볼도의 회화는 확장과 축소를 손쉽게 할 수 있어 이 오페라의 원작이 되는 카를로 고치의 콤메디아 델라르테(16~18세기 이탈리아에서 유행한 즉흥극)의 특징을 살린 가설극장처럼 느껴졌다. 카타리나 골트는 캐릭터의 특징을 의도적으로 부풀린 의상으로 작품의 풍자성과 희화적 요소를 부각했다. 이날 오페라는 여러 가지 색깔이 현란하게 사용됐지만 무대에서는 모두 세련되게 어우러졌고 고희선의 조명은 그러한 특징을 잘 살려냈다.

역시 콤메디아 델라르테 양식에 기반해 등장한 8명의 리디큘러스는 기존 오페라 양식으로 본다면 말 그대로 황당할 정도로 작품에 개입했다. 이들은 해설자 역할을 자처하며, 여러 가지 콘셉트로 방만해지기 쉬운 작품의 중심을 잡아줬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지막 4막이었다. 연출가는 이미 정통 오페라 양식의 비틀기를 시도한 이 작품을 한 번 더 비틀었다. 4막의 무대 전환은 그대로 객석에 노출됐다. 세트를 배치하기 위해 스태프들이 돌아다니고, 출연진이 무대에 자리 잡는 어수선한 상황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모든 배역이 각자 역할에 심취해 우왕좌왕하다가 흐지부지 끝나버리는 결말 또한 전통적 오페라의 웅장한 피날레와는 거리가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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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의 한 장면. /국립오페라단
왕자가 세 개의 오렌지를 구하는 여정과 그 끝은 베르디나 바그너의 그것과는 다르다. 유아 퇴행적 행동을 일삼는 왕자는 영웅이 아니며, 다 부서진 마네킹으로 변해버린 공주는 왕자에게 아무런 구원이 되어주지 못한다. 왕은 오로지 권위에만 중독되어 있을 뿐이고, 악당마저도 목적을 이루겠다는 절실함이 없어 결말의 부조리함을 강조한다. 연출은 18세기 콤메디아 델라르테의 전통과 볼셰비키 혁명을 목도 한 프로코피예프의 허무한 표현주의를 절묘하게 결합시켰다.

이날 성악가들은 모두 탁월한 연기와 가창으로 객석을 사로잡아 한 곳도 빈 구멍이 없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특히 왕자 역할의 테너 강영우, 첼리오 역할의 베이스 최공석, 클라리스 역할을 맡은 메조 소프라노 카리스 터커의 음색과 표현력은 발군이었다. 펠릭스 크리거가 이끈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또한 탄력 있는 연주로 무대와 좋은 앙상블을 이뤘다.

프로코피예프는 이 작품 초연 때 '볼셰비키 풍의 러시안 재즈'라는 혹평을 들었다고 한다. 어느 시대든 혁신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 낯선 작품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만든 제작진의 역량에 박수를 보낸다.

/손수연 오페라 평론가·단국대 교수

손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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