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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봄날’, 전쟁의 기억 속에서 피어난 가족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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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7. 01. 15:29

분단의 상흔을 보듬는 따뜻한 무대… 제1회 보훈연극제 공식참가작
가극배우 할아버지와 시니컬한 손녀, 일상 속에서 되찾는 봄날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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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성 역의 이민재(오른쪽)와 희선 역의 신승희(왼쪽), 연극 '그들의 봄날'은 가족의 갈등과 화해를 통해 분단의 상처를 되새기는 작품이다. / 사진 창작집단 은결
아시아투데이 전형찬 선임 기자 = 지난 상처를 마주하는 일은 언제나 고통스럽지만, 그 기억을 보듬는 연극은 한 편의 위로로 관객 앞에 다가온다. 보훈연극협회가 주최하고 서울연극협회가 후원하는 제1회 보훈연극제의 공식 참가작 '그들의 봄날'은, 가족이라는 가장 사적인 관계를 통해 우리 사회의 가장 오래된 상흔-분단의 역사와 전쟁의 후유증-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작품은 전직 가극배우였던 할아버지 '태성'과 그 손녀 '희선'이 함께 보내는 일상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남다른 청춘 시절을 보냈지만 이제는 손녀와 보내는 시간이 삶의 전부가 된 태성과, 그런 할아버지가 귀찮기만 한 사춘기 소녀 희선. 두 사람의 관계는 투닥거림과 무심한 대화 속에서 하나씩 드러나는 과거의 기억과 진심으로 서서히 변주된다.

단순한 세대 갈등으로 출발한 이 가족극은 점차 그 안에 숨겨진 깊은 역사적 맥락으로 확장된다. 작품을 쓰고 연출한 신승희는 이 이야기를 단지 창작이 아닌, 실제 자신의 할아버지 삶에서 출발한 연극이라 밝힌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과거 인민군이었고, 이후 반공포로로 전향해 다시 국군이 되어 전선에 나섰던 인물이다. 동료였던 이를 향해 총구를 겨눠야 했던 그 세대의 고통스러운 경험은, 더 이상 말해지지 않는 역사이자, 많은 가정에 뿌리처럼 얽혀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연극이 다루는 '봄날'은 단지 계절이나 은유가 아니라, 가슴 속 깊이 묻어둔 상처의 회복을 의미하는 시간이다. 이 봄은 모두에게 오지 않는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미 지나갔고, 누군가에게는 아직 멀게 느껴진다. 그러나 작품은 이야기 속 인물들-할아버지와 손녀-의 관계를 통해, 그 봄이 언젠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음을 담담하게 전한다.

태성 역을 맡은 배우 이민재는 현실과 꿈 사이를 오가는 복잡한 감정선을 절제된 몸짓과 목소리로 소화해낸다. 한때는 무대 위에서 박수를 받던 예술가였지만, 지금은 한 세대와 소통조차 버거운 노인으로 살아가는 인물의 이면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신승희가 직접 연기하는 희선 역 역시 눈여겨볼 지점이다. 시니컬하고 반항적인 외면 속에 깃든 혼란과 변화의 순간들을 자연스럽게 끌어내며, 극의 중심 감정을 이끌어간다.

무엇보다 '그들의 봄날'은 '보훈'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재정의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의 삶은 점점 더 역사 속으로 밀려나고 있지만, 그 상흔은 여전히 현재를 사는 이들의 삶에 흔적을 남긴다. 이 작품은 총성과 이념의 전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바로 지금의 세대를 위한 보훈극이기도 하다. 보훈이란 기념비 앞의 경례가 아니라, 가족을 이해하고 과거를 대면하는 삶의 태도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연출자는 "꿈이란 거창한 성공이 아니라, 가장 근본적인 소망을 다시 찾는 것"이라 말한다. 이 무대는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가족의 이름으로 던져지는 질문과, 잊힌 기억 속 작은 진심들이 모여 깊은 울림을 만들어낸다. 소란스럽지도 눈물에 기대지도 않지만, 이 연극은 조용하고도 단단하게 관객의 마음을 두드린다.

'그들의 봄날'은 우리가 언젠가 지나쳤거나 아직 마주하지 못한, 그리고 지금 다시 떠올려야 할 봄날에 대한 연극이다. 전쟁과 분단이라는 시대적 트라우마가 남긴 아픔을, 가족이라는 일상의 언어로 복원해내는 이 작품은 보훈연극제가 왜 계속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이기도 하다. 그 봄날은, 결국 모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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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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