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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기획] 인공지능이 여는 새 법정… ‘재판 장기화’ 난제도 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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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연 기자 | 손승현 기자

승인 : 2025. 11. 10. 06:00

재판지연·행정부담 해소위해 추진
관련 판례 검색 등 업무 자동화 기대
책임 소재 인한 법·윤리적 과제 여전
미국·싱가포르·호주 등 단계적 도입
韓 AI 위원회 출범… 연내 로드맵 마련
인공지능(AI)의 도입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 됐다. 인간의 판단과 법리 해석이 중심이던 법정에도 AI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다. 법원은 '사법부 인공지능위원회'를 출범시키며 AI를 사법 현장에 본격 도입하기 위한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재판 지연 해소와 국민의 사법 접근성 제고를 동시에 실현하겠다는 목표다.

사법부가 AI에 주목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재판 장기화'라는 고질적 과제를 풀기 위함이다. 법원에는 사건이 산적해 있고, 각종 행정 절차와 문서 작성, 법령·판례 조사에 소요되는 시간이 적지 않다. 반복적이고 시간 소모적인 업무는 결국 재판 지연으로 이어지고, 국민은 '지연된 정의'에 사법 불신을 키운다.

이런 상황에서 AI는 혁신적이고도 강력한 보조 도구가 될 수 있다. 수많은 판례와 법률 문서를 빠르게 검색해 유사 사건을 찾아내고, 사건의 쟁점을 중심으로 주요 법리를 자동 정리해 판사에게 제시할 수 있다. 또한 사건 기록을 분석해 핵심 문장을 추출하거나, 판결문 초안을 작성하는 과정에서도 기존 판례 문체나 법리 전개 방식을 학습한 AI가 참고 문안을 제시할 수 있어 판사의 업무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 결국 단순하고 반복적인 행정 업무를 덜어줌으로써 판사들이 보다 숙고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현재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개인정보 비실명화에도 AI가 투입된다.

36년간 법관으로 재직했던 강민구 변호사(법무법인 도울)는 "AI를 사법에 도입하면 단순 효율화를 넘어 재판문화 자체가 바뀔 것"이라며 "가장 큰 효과는 판결문 작성 자동화에 따른 재판지연 해소"라고 말했다.

강 변호사는 "지금 재판이 늦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판사들의 판결문 작성 부담이다. 주심이 일주일에 세 건만 써도 밀리고, 결심 후 선고가 몇 달씩 늦어진다. 그런데 AI가 기록 요약, 주장 정리, 증거 분석을 맡는다면 판사는 본질 판단에 집중할 수 있다"며 "AI가 원고와 피고의 주장 요약, 관련 법리와 판례 추천까지 자동으로 해주면 판사는 레고 블록 조립하듯 판결문을 완성할 수 있다. 이 경우 주당 세 건이 아니라 5~6건까지도 처리 가능하다. 실수는 줄고, 선고 속도는 지금보다 몇 배 빨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AI 도입은 사법 접근성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효과가 예상된다. 국민들에게 AI를 통해 사건 관련 판례와 법리, 서류 작성 요령 등을 신속하게 안내해 법정의 문턱을 낮출 수 있다. 사법절차 전반에 음성변환, 자막 자동생성, 그림 기반 의사소통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맞춤형 AI 기술을 도입해 정보 접근성과 편의성을 높일 수도 있다.

한국인공지능법학회 회장인 최경진 가천대 법학과 교수는 "AI의 도입으로 가장 기대되는 효과는 국민들의 재판받을 권리를 강화한다는 것"이라며 "AI를 통해 비슷한 사건에 비슷한 정도의 양형이 내려질 수 있다. 공정하고 평등한 결과도 AI를 통해 실현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다만 AI 도입엔 풀어야 할 법적·윤리적 과제가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 책임의 소재다. AI가 제시한 분석 결과를 근거로 판사가 결론을 내렸을 때, 그 판단에 오류가 발생했더라도 책임 소재는 불분명하다. 다른 산업과 달리 법률업무는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면 사건 당사자들에게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AI가 학습하는 데이터의 편향성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특정 시기나 지역의 판결 데이터를 기반으로 학습한 AI는 기존의 사회적 편견이나 불평등을 그대로 반영할 위험이 있다. 이는 결국 사법의 공정성과 중립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비판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절차적 공정성의 위배 가능성도 주요 쟁점이다. AI가 재판 과정에서 양형 심리 등 일정 부분 판단에 영향을 미치게 되면, 인간 판사가 충분히 숙고할 기회를 잃거나 기술적 판단이 법적 판단을 앞서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나아가 사법부가 기술에 과도하게 의존할 경우 인간의 법감정과 도덕적 판단이 배제된 '기계적 정의'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그러나 최 교수는 "법적, 윤리적 문제는 인간도 갖고 있는 문제"라며 "계속해서 위험성을 줄여나가면 된다. 휴먼인더루프(HITL·인공지능 모델의 훈련·조정·검증 과정에 인간이 지속적으로 참여해 의사결정을 보완하는 방식)를 갖춘다면 문제는 없어보인다"고 부연했다.

세계 각국의 사법부 역시 AI 도입을 활발히 실험하고 있다. 미국은 주 법원을 중심으로 AI 챗봇, 재범 예측 프로그램, 판결문 자동화 등 AI 서비스를 단계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싱가포르 법원은 민사 소액재판소에서 생성형 AI 시범 도입에 나섰다. 호주 법원은 2020년 6월부터 별거 중인 부부의 자녀 양육과 가사 분쟁 해결을 돕는 AI 서비스 '아미카(AMICA)'를 도입했다.

한국도 지난 4월 대법원 법원행정처장 자문기구인 '사법부 인공지능위원회'를 출범시키며 사법부 AI 도입의 컨트롤타워를 마련했다. 위원회는 사법부 AI 도입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관련 개발사업 점검과 법제도 검토를 병행한다. 위원회는 올해 안으로 사법부 AI 로드맵 및 중장기 파일럿 프로젝트를 내놓을 방침이다.
김채연 기자
손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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