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Advertisements

[아세안의 설계자들 ③] “돈 둘 곳 없게 부자로”…건설재벌 아누틴의 ‘태국 재시동’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ww2.asiatoday.co.kr/kn/view.php?key=20261007010001740

글자크기

닫기

정리나 하노이 특파원

승인 : 2026. 10. 13. 06:00

구글 검색 선호 출처 추가 Google 검색에서 아시아투데이 기사를 더 자주 볼 수 있습니다.

Advertisements

Advertisements

건설재벌 2세·장기 이송하는 조종사
색소폰·볶음밥으로 친근한 ‘시아 누’
탁신·군부·개혁진영 넘나든 연합의 기술
2% 성장·가계빚 86%에 ‘규제 철거’ 승부
clip20261007005953
미국에서 공학을 공부한 뒤 가족기업 시노타이 경영에 참여한 젊은 시절의 아누틴. /더피플 캡쳐 갈무리
지난달 27일(현지시간) 오전 태국 방콕 북부 방켄구 루암팟타나 마을. 아누틴 찬위라꾼 태국 총리가 도착하자 물에 잠긴 골목에서 "부자 돼서 못 살겠다!"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아누틴 총리가 스스로 내건 선거 구호를 되받은 말이었다.

그는 지난 1월 총선 유세에서 자신에게 국정을 4년 더 맡겨주면 국민이 "부자가 돼 못 견디겠다"고 외치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서민과 빈곤층에게 특히 취약했던 대홍수 속 물난리를 겪은 주민들은 그 공약을 그대로 돌려줬다. 전날 배급받은 음식도 모자랐고 이동식 화장실 조차 없다는 호소도 이어졌다.

아누틴 총리는 그 자리에서 아둔 분탐짜른 국방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마을에 이동식 취사장을 차리라고 지시했다. 취사장이 들어서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인근 노점 세 곳에 사비 1만8000바트(약 72만원)을 건네며 주민들에게 나눠줄 음식들을 부탁했다. 같은 날 오후 찾은 방카피구 클롱찬 공공주택단지는 물이 1.5m가량 차 있었다. 그는 직접 배를 타고 구호품을 나눠줬고, 건물 펌프실에 찬 물을 퍼낼 배수펌프를 보내달라는 주민들에게 필요한 펌프 규격을 직접 물었다.

총리의 전화 한 통에 음식이 나오고 장비가 움직였다. 바꿔 말하자면 총리가 오기 전까지 이재민들은 끼니와 화장실 같은 최소한의 것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태국의 현실이 드러난 것이다. 현장에서 바로 답을 내놓는 총리의 순발력과 한때 동남아의 맹주로 꼽혔던 태국 행정의 빈틈이 공존하는 장면이었다.

아누틴 총리는 현장으로 달려가 책임자에게 전화를 걸고, 당장 손에 쥘 수 있는 해법부터 내놓는 정치인이다. 건설재벌 2세이자 색소폰을 즐겨부는 비행기 조종사인 그가 보건장관과 내무장관을 거쳐 총리에 오르는 동안 '직접 해결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줄곧 따라붙었다. 그 방식이 2%대 성장에 갇힌 태국 경제에도 통할까.

clip20261007010412
2026년 7월, 말레이시아 푸트라자야 총리 관저에서 열린 오찬 중 색소폰을 연주하는 아누틴 태국 총리(오른쪽)와 이에 맞춰 노래하는 안와르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총리/태국 총리 공보실
◇ 색소폰 불고 장기 실어 나르는 '시아 누'

아누틴 총리는 1966년 방콕의 화교계 부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차와랏 찬위라꾼은 대형 건설사 시노타이엔지니어링앤드컨스트럭션을 키운 뒤 정계에 들어가 내무장관과 총리 권한대행을 지냈다. 아누틴 총리도 미국 호프스트라대에서 공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가업에 합류했다. 태국 언론은 그를 어린 시절 별명 '누'에 화교계 부자 사업가를 일컫는 '시아'를 붙여 '시아 누'라고 부른다.

그가 올해 신고한 재산은 32억8400만바트(1308억 원)다. 재산목록에는 비행기 3대와 모터보트 2대, 고급 시계 22점, 불상·부적 24점이 올랐다. 부를 감추지 않는 대신 그는 자기 비행기로 이식용 장기와 의료진을 실어 나른다. 아누틴은 "한 번 비행으로 심장·폐·신장·각막을 가져오면 여러 환자를 살릴 수 있다"면서 이식한 장기가 새 몸에서 뛰기 시작했다는 연락을 받을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대중 앞에서는 악기를 들고 앞치마도 두른다. 지난 7월 말레이시아를 공식 방문했을 때는 안와르 이브라힘 총리가 주최한 오찬에서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를 색소폰으로 연주했고, 안와르 총리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이번 수해 때는 당사에 차린 주방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닭고기 바질볶음과 돼지고기 요리를 직접 만들었다. 재벌가 상속자이면서도 조종간과 색소폰, 웍을 직접 잡는 친근한 모습은 그의 오랜 정치 자산이다.

clip20261007005815
어린 시절 차찻 차이 춘하완 전 총리와 함께한 아누틴. 건설업과 정치권을 오간 부친 차와랏의 인맥 속에서 성장했다. /SNS 캡쳐 갈무리
◇ 탁신·군부 넘나들며 판 짠 '연정 기술자'

정치인 아누틴은 연정을 다루는 데 능했다. 그는 2004년 탁신 친나왓 정부에서 차관으로 입각했지만, 2007년 법원이 탁신의 타이락타이당을 해산하면서 5년간 정치 활동을 금지당했다. 2012년 품짜이타이당 대표로 복귀한 뒤에는 군부 출신 쁘라윳 짠오차 정부에서 부총리 겸 보건장관을, 탁신계 프아타이당이 이끈 정부에서 부총리 겸 내무장관을 맡았다.

지난해 프아타이당 연정에서 빠져나온 뒤에는 개혁 성향 인민당의 지지를 받아 총리에 올랐다. 인민당과 약속한 대로 하원을 해산했고, 지난 2월 8일 총선에서 품짜이타이당을 191석의 제1당으로 끌어올렸다. 이어 프아타이당을 포함한 16개 정당을 묶어 하원 292석을 확보하고 총리직을 지켰다.

아누틴의 정치 이력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일관된 노선보다 필요한 의석을 그때그때 만들어내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왕실과 보수 엘리트의 신임을 받으면서도 지방 토호 정치인들과 손을 잡았고, 탁신계와 군부, 개혁 진영 사이를 오가며 매번 새 연립정부를 꾸렸다.

대표 정책인 대마 규제 완화에서도 이런 방식이 드러났다. 그는 2019년 총선에서 의료용 대마 허용을 공약했고, 보건장관이던 2022년 대마를 마약류 목록에서 뺐다. 그러나 판매와 사용을 관리할 법률이 뒤따르지 않으면서 대마 판매점이 우후죽순 늘었고, 결국 정부가 다시 규제를 조이는 혼선이 빚어졌다. 공약은 빨리 지켰지만 제도 정비는 뒤처졌다는 지적이 나온 까닭이다.

clip20261007010201
아누틴이 기증 장기를 옮기는 '날개 달린 심장' 임무를 위해 직접 조종석에 오르고 있다. /워크포인트 투데이 캡쳐 갈무리
◇ 2%대 성장 늪…낡은 규제부터 걷어낸다

건설재벌 2세 앞에 놓인 가장 큰 공사는 태국 경제 재건이다. 자동차·전자 산업과 관광을 앞세워 동남아 대표 생산기지로 올라섰던 태국은 최근 수년간 2%대 초반 성장에 머물고 있다. 세계은행은 올해 태국 성장률을 2.0%로 전망했다. 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는 86% 안팎이다. 고령화와 투자 부진, 낮은 생산성도 발목을 잡고 있다.

아누틴 정부는 낡은 법률을 한꺼번에 손보는 '옴니버스법'과 여러 인허가를 하나로 묶어 기간을 줄이는 '슈퍼 라이선스'를 추진하고 있다. 전력시장 개방과 가계부채 경감, 인공지능(AI)·반도체 투자 유치도 정책 과제로 내걸었다. 묵은 규제를 걷어내고 사업 속도를 높여 민간 투자를 되살리겠다는 구상이다.

basic_2022
/아시아투데이 그래픽
다만 인허가 절차가 짧아진다고 경제 체질이 저절로 바뀌리란 보장은 없다. 세계은행은 태국이 고소득국으로 올라서기 위한 조건으로 기술 도입과 혁신, 인적자원 개발, 기업 간 경쟁 촉진, 방콕 밖 지방 도시의 일자리 확대를 꼽았다. 투자를 받은 기업이 크고, 노동자의 숙련도와 임금이 함께 올라야 한다는 얘기다.

1월 유세장에서 박수를 받았던 "부자가 돼 못 견딜 것"이라는 약속은 8개월 뒤 물에 잠긴 방콕에서 야유가 돼 돌아왔다. 성장을 발목 잡던 원인들은 만연하고 극심한 빈부 격차로 돌아왔다. 이젠 월급이 빚보다 빠르게 늘고, 홍수 뒤 다시 문을 연 가게에 손님이 돌아와야 같은 말이 다시 박수를 받을 수 있다. 인허가를 줄이고 사업을 서두르는 건 건설 재벌 아누틴이 잘하는 일이다. 다만 태국 총리 아누틴의 경제 정책이 성공했는지는 성장률 숫자보다 서민 살림살이로 판가름 날 것이다.
정리나 하노이 특파원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

Advertise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