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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잠시, 영화 ‘군체’를 성찰적으로 바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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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6. 07. 07.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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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미디어스쿨 교수
연상호 감독 연출, 좀비 영화 '군체'에는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도드라진 것은 '일진 커플과 왕따 소녀'다. 영화의 도입부, 고급 일식당에 들어선 이들 무리는 메뉴를 훑다가 과하다 싶게 많은 양을 주문한다. 이내 커플은 피해 여학생에게 계산을 종용한다. 그러나 그들은 시킨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예의 좀비 장르가 그렇듯 빠르게 사태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설정은 왕따 소녀가 자신을 괴롭혔던 가해 여학생을 챙긴다는 점이다.

가해 소녀는 극의 초반 세 보이던 모습과는 달리 민폐 캐릭터 자체다. 사사건건 이 인물로 인해 다른 이들이 감염자가 되어버린다. 그런데도 사단이 날 때마다 왕따 소녀는 일진 소녀의 목숨을 구해준다. 감동한 가해 소녀는 피해자였던 소녀에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렇게 침착할 수 있냐고 물어본다.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괴롭혔던 그 지옥보단 더 참혹하지는 않아" 미안하다고 말하는 일진 소녀에게 왕따 소녀는 여기서 살아 나가면 그때 가서 정식으로 사과하라고 말한다.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연결감과 통제감'이다. 현대 디지털 문명은 개인의 자기통제와 시스템에 의한 타인의 통제 모두 미디어로 매개돼 있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고 감시하는 사회에서 사랑과 연대의 촉각적인 접촉은 금기시되고 오로지 이미지화된 시그널로만 존재가치를 증명한다. 이런 현상을 숙주 삼아 기생하는 시각적 통제 권력은 가공할 폭력을 양산한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의 위치싸움은 어떤 이가 보는 자에 위치하는가에 따라 우리 사회의 방향을 좌우지한다.

군체에 등장하는 인물들 간의 설정을 살펴보면, '이타적인가 아니면 이기적인가'와 '보는 자인가 보이는 자인가'의 조합임을 알 수 있다. 먼저 이타적이면서 보이는 자는 당연하게도 처음부터 철저히 희생당한다. 다음으로 이타적이면서 보는 자의 위치에 선 이들 역시 궁극엔 희생당하거나 혹은 믿었던 이들로부터 배신을 당한다. 다만 이데올로기로서 숭고함을 남긴다는 점에서 차별화될 뿐이다. 반면 이기적이면서 보이는 자들은 시종일관 이타적인 이를 희생시켜 연명해 가다가 끝내 그들 역시 파멸한다. 마지막으로 이기적이면서 보는 자의 관심은 책임을 미루고 오로지 이해관계에만 있다. 이들은 특히 특정 부류와 공간을 게토화하고 조롱과 혐오의 정서를 조장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고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 하지만 그 어리석음의 끝은 제방을 터트리는 우를 범하기에 공멸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가져오기 일쑤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의 지난 권력은 우울하게도 이기적인 자들이 차지한 경우가 더 많았다.

물론 위와 같은 범주에는 당연하게도 오류가 있다. 대부분의 우리는 적당히 이타적이며 기꺼이 이기적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는 보는 자로서 권력자의 자격에 대해, 대중의 선택이 그녀 혹은 그가 이타적이거나 이기적이냐는 것은 중요치 않다는 데 있다. 다만 사필귀정이겠지만, 그녀 혹은 그가 어디에 가치를 두었는가는 그들이 걸어간 길이 말해줄 것이다. 사후적으로 그것을 역사라고 부른다.

권력자의 속성은 군중을 통제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대중 역시 리더를 통제하고자 하는 의지가 내면화돼 있다. 이와 같은 코드가 만나 일체감으로써 개별자들은 대중으로 포획되고, 특정한 구심점도 대중에 의해 나포되기 일쑤다. 영화 군체는 시력을 잃은 군대개미들이 앞서가는 개미의 페로몬을 따라가다 길을 잃고 죽을 때까지 커다란 동심원을 그리며 맴도는 '앤트밀 현상'을 원용하고 있다. 무비판적인 맹목적 추종의 끝은 추앙하던 구심력을 열섬에 가두고 마침내 열로 들끓게 하여 숨통을 멈추게 한다. 물론 영화에서는 개인적 복수심에서 출발한 사회에 대한 증오를 테러라는 극단적 행위를 통해 세상을 리셋하려는 과학 엘리트 빌런이 자멸한다는 설정이지만, 이를 대중민주주의와 통치행위의 왜곡된 형태에 적용해 볼 필요가 있겠다.

리더에 대한 사랑과 애정은 남녀의 사랑에 버금간다. 그런데 남녀의 합일이 의외로 공서적인 관계로 비뚤어질 가능성이 크다. 가학과 피학적 관계 설정은 곧 주종의 관계로 귀결되며 파탄에 이르게 한다. 정서적으론 일체를 이루지만 대등한 관계는 보통의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통제하거나 통제받기를 조정하며 템포를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이상적인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를 언급함이다. 모처럼 이타성에 기초한 탁월한 지도자가 나왔을 때, 그 혹은 그녀와 일체감을 느끼고 지지하는 것은 근대 이후에 민중이 누리고자 한 열망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무오류라는 확신이 드는 순간이 바로 위기'일 수 있다는 의식을 늘 장착한 '목민관'이라면 여론을 경청하고 궤도를 수정하거나 속도를 조절한다.

혁명은 리셋이지만, 개혁은 고려할 것이 많으므로 힘이 든다. 그러나 과거가 현재를 구해왔듯 그간의 비극적 상황들은 켜켜이 레이어로 각인돼, 우리가 선택할 방향이 무엇인지 뚜렷이 가리키고 있다. 사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왕따 소녀와 일진 소녀의 가학과 피학적 관계는 전복되지도, 해체되지도 않았다. 끝까지 가해자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피해자를 배신한다. 공서적 관계의 위험성은 그 일방의 달콤함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한다는 데 있다. 또 다른 한편 리더를 사랑한다고 무조건 추앙하는 것과 애정을 전제로 올바른 방향이 무엇인가를 함께 살펴보자는 태도는 전혀 다르다. 후자의 말은 절대 달콤하지 않다. 사람을 살리는 명약은 달지 않고 쓰다. 연결과 통제 사이에, 어떤 악마의 디테일이 숨어 있는지 톺아보아야 할 이유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미디어스쿨 교수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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