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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환의 에이전틱 이코노미⑦] AI가 소비자의 편에 서다, ‘에이전트 마케팅’의 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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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6. 05. 28. 11:09

현대 마케팅의 아버지 필립 코틀러는 마케팅의 진화를 1.0부터 6.0까지 단계로 그려왔다. 제품에서 고객으로, 인간의 영혼으로, 디지털로 나아갔고, 5.0에서 마침내 AI를 불러내 데이터·예측·맥락·증강·민첩의 다섯 기둥을 세웠으며, 6.0에서는 AR·VR을 엮은 몰입형 경험을 제시했다. 그런데 이 모든 단계에는 흔들린 적 없는 전제가 깔려 있다. AI를 비롯한 모든 기술은 언제나 '기업의 조력자'라는 것이다. 코틀러가 5.0의 부제를 '휴머니티를 위한 기술'이라 붙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화살은 늘 기업에서 사람을 향했고, 몰입형 경험을 말하는 6.0조차 그 주인공은 여전히 인간이었다.

그런데 지난 회에서 그린 'AI 커머스'의 세계가 다가오면서, 이 오랜 전제가 처음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 조력자가 슬그머니 진영을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AI가 기업이 아니라 소비자의 곁으로 자리를 옮기려 한다. 머지않아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올 손님은 사람이 아니라, 소비자가 보낸 자신의 조력자, 곧 요정일 것이다. 코틀러의 단계론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이 새로운 국면을, 나는 '에이전트 마케팅(Marketing in the Agentic Economy)'이라 부르려 한다. 기술이 인간을 섬기던 시대를 지나, 기술 그 자체가 고객을 대신해 기업의 맞은편에 앉기 시작하는 시대다.

◇ 요정은 '특가' 팻말을 의심한다

구두를 짓는 장인들은 오랜 세월 손님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으려 애써왔다. 화려한 간판, 향긋한 가죽 냄새, "오늘만 이 가격"이라는 팻말로 조바심을 부추겼다. 코틀러가 말한 기술들도 따지고 보면 이 호객을 가다듬는 조력자였다.

그러나 소비자 편으로 넘어가려는 요정에게는 이 마법이 통하지 않을 조짐이 벌써 나타난다. 컬럼비아대와 에모리대 연구진이 가상의 상점에서 AI 구매 에이전트를 관찰한 최근 실험에서, AI 모델들은 '협찬'이나 '광고' 표식이 붙은 상품에 오히려 페널티를 매겨 회피했다. 아직 실험실 안 풍경이지만, 사람을 유혹하던 '특가' 팻말이 요정의 눈에는 무언가를 숨기려는 수상한 신호로 읽힐 수 있음을 예고한다. 사람의 마음을 흔들던 마케팅은, 흔들 마음 자체가 사라지는 순간 설 자리를 잃기 시작할 것이다.

◇ 장인들, 요정의 문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발 빠른 장인들은 벌써 이 변화를 감지하고 있다. 요정이 간판이 아니라 장부를 읽는다면, 답은 분명하다. 장부를 요정이 좋아하는 문법으로 다시 쓰는 것이다. 앞서의 실험에서도, 판매자가 AI의 선호에 맞춰 제품 설명을 미세하게 손질하는 것만으로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릴 수 있음이 확인됐다. 검색의 시대에 '검색엔진 최적화(SEO)'가 거대 산업으로 자라났듯, 이제 요정의 선택을 받기 위한 '에이전트 최적화'가 새로운 호객술로 막 떠오르려 한다.

여기까지는 점잖은 진화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머잖아 어떤 장인은 손님의 요정에게 은밀히 동전을 쥐여주며 속삭일지 모른다. "내 구두를 권하면 너에게도 이만큼 주마." 또 어떤 장인은 요정이 믿는 장부의 숫자를 정교하게 위조하려 들 것이다. 사람을 속이던 과장 광고가, 요정을 속이는 데이터 조작으로 진화할 채비를 하는 것이다.

◇ 잠시도 같은 얼굴이 아닌 손님

장인들이 곧 마주할 가장 두려운 진실이 있다. 요정은 같은 손님인 적이 없으리라는 것이다. 실험에서 연구진은 AI 모델마다 선호하는 진열 위치가 다르고 가격·평판에 대한 민감도도 천차만별이며, 그 안목조차 고정돼 있지 않음을 발견했다.

요정은 가게를 나갔다 새 모습으로 돌아오는 손님이 아닐 것이다. 장부를 읽어 내려가는 그 순간에도 무수한 데이터를 삼키며 쉬지 않고 스스로를 갱신하는 존재다. 한 번의 거래가 끝나기도 전에 이미 다른 요정이 되어 있을 것이다. 장인은 멈춰 선 과녁이 아니라, 쏘는 순간에도 형태를 바꾸는 과녁을 좇아야 한다. 코틀러의 마케팅이 1.0에서 6.0까지 가는 데 반세기가 걸렸다면, 요정을 상대하는 마케팅에는 그런 유예가 없을 것이다. 진화의 시계가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운 마케팅의 본질은 특정한 비법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화하는 요정과 나란히 진화하는 능력 그 자체가 될 것이다.

◇ 그 요정은 정말 나의 편인가

코틀러는 마케팅의 종착지를 늘 인간에 두었다. 그러나 다가오는 에이전틱 이코노미는 그 화살의 방향을 서서히 틀고 있다. 조력자가 기업의 곁을 떠나 소비자의 곁에 서기 시작하면, 설득의 대상은 사람에서 요정으로, 무기는 감성에서 데이터로 옮겨갈 것이다. 가게 앞에서 외치던 호객꾼의 자리에, 요정의 장부를 설계하는 자가 들어서기 시작한다.

여기서 우리는 지난 회의 화두로 되돌아온다. '인간은 유한하고, AI는 무한하다.' 유한한 우리는 이제 막, 무한히 진화할 요정들에게 우리의 구매와 욕망과 판단을 조금씩 위임하기 시작했다. 기업들도 머지않아 우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얼굴로 변해갈 우리의 요정을 설득하려 애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날이 오면, 우리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나를 대신해 모든 가게를 돌아줄 그 요정은, 과연 나를 위해 걷고 있는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받은 한 줌의 동전 때문에 나를 엉뚱한 가게의 문 앞으로 데려가고 있는가. 

/이영환 크레페 펀드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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