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신라 이후 언어와 제도와 풍습의 중국화가 본격 진행되기 시작했다. 불교는 인도산이므로 중국화의 핵심에는 늘 유교화가 있었다. 유교화는 유교 경전을 읽고 한문을 습득하는 아동교육에서부터 시작된다. 한문을 익히다 보면 유교 윤리가 몸에 저절로 배어든다.
중국화 즉 유교화는 고려를 거치고 조선에 와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유교 중에서도 특히 주자학을 숭상한 조선은 중국보다 더 중국적인 나라였다. 중국 주변 어디에도 조선처럼 비자주적인 나라는 없었다. 아마 조선만큼 착하고 힘없는 나라도 없었을 것이다. 주자학은 부국강병을 금기시했다.
19세기 말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근대화 과정은 부강한 근대 국민국가 형성을 위해 한문을 버리고 중국화 즉 유교화로부터 이탈하는 과정이었다. 그것은 또한 영어와 서양의 근대문물을 받아들이고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했다. 근대화는 서구화 외에 다른 것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옥중기도
중국화 유교화를 버리고 근대화 서구화로 나아가는 문명사적 대전환의 급선봉에 이승만(1875~1965)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주자학을 공부하고 마지막 과거시험에서 떨어진 이승만은,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에 들어가 영어와 서양 근대문명을 배웠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이승만은 서양문명의 외형만 받아들이지 않고 그 정신까지 받아들였다. 그는 유교국가 조선의 왕 고종을 쫓아내려다가 사형선고를 받고 한성감옥에 갇히게 된 1899년, 기독교의 하나님을 만났다. 그는 기도했다. "오, 하나님, 내 나라를 구하시고 내 영혼을 구하소서."
절망적 상황에 처한 청년 이승만의 기도에는 자신이 어릴 적부터 배운 중국의 유교와 주자학으로는 나라도 못 구하고 영혼도 못 구한다는 판단이 이미 전제되어 있었다. 그는 유교와 주자학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기독교의 하나님에 의지했다.
그의 옥중 기도는, 통일신라 이후 1300년 동안 지속돼 온 중국화 즉 유교화의 기나긴 과정을 일거에 뒤집어엎고 서구화 즉 근대화로 나아가는, 단군 이래 가장 급격했던 문명사적 대전환의 징표였을 뿐만 아니라, 그 문명사적 대전환을 내면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뒷받침해 주는 정신사적 대전환의 징표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유교와 아버지중심주의
이승만은 왜 중국의 유교로는 나라와 영혼을 구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는 답을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유교의 본질이 효(孝) 한 글자에 있고, 효란 아버지의 말씀에 대한 자식들의 무조건적 순종임을 안다면 답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아버지와 그의 말씀을 절대시하다 보면 자식들은 집안의 울타리 안에 발이 묶여, 한편으로는 인간 세상으로 멀리 나아가 나라를 구하기 어려울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의 내면세계로 멀리 물러나 영혼을 구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런 탓인지 유교 국가에서는 그렇고 그런 충신과 효자는 많아도 제대로 된 영웅과 성자는 찾기가 어렵다.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집안의 아버지를 하나님 아버지로 바꾸는 역부환조(易父換祖)의 패륜일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부친 살해(patricide)이고 유교 파괴다. 중국화에서 서구화로 바뀌고 유교화에서 근대화로 바뀌는 문명사적 대전환의 정신적 핵심에는 부친 살해가 있었다. 이승만은 부친 살해와 유교 파괴의 선봉장이었다.
유교 파괴와 부친 살해는 기독교에 의해서만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불교나 동학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이승만의 기독교 수용은 유교에 의해 억압된 종교적 열망의 해방을 알리는 각종 신호탄들 가운데 하나였다. 유교의 몰락 과정은 20세기 종교의 시대가 열리는 과정과 동시적이었다.
조선의 멸망과 함께 20세기 한국에서는 각종 종교들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면서, 한편으로는 일상적 세계 너머 초월적 세계로 우리를 초대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과 국가의 발달을 환영했다. 유교는 각종 종교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기독교는 서양 근대문명과 불가분했다는 점에서 불교나 동학과는 달랐다.
◇영웅은 왜 폄하되는가
세계 문명사의 미래를 정확하게 예견하고 서양 근대문명을 기독교와 함께 받아들인, 이승만과 같은 급진적인 동시에 현실적인 사상가는 당시의 동아시아 어디에도 없었다.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도, 중국의 담사동(1865~1898)이나 양계초(1873~1929)도 결국은 동아시아의 전근대적 전통을 버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동도서기(東道西器)론의 한계에 갇혀 있었다.
오직 이승만이라는 혁명적 사상가 한 사람만이 동도서기론의 한계를 돌파하여 미국 중심으로 서세동점이 진행되는 20세기 세계 문명사의 미래를 예견하고 대비했다. 그의 이 같은 선견지명의 지혜는 그의 견인불발의 용기와 합작하여, 붉게 물든 유라시아 대륙 전체와 조선인민공화국에 맞서, 한반도 남쪽에 대한민국을 세우고 지켜내는 세계사적 기적을 연출했다.
그런 이승만이 대접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중국화 즉 유교화가 절정에 이른 조선시대 이래의 오랜 전통이 그랬다. 유교는 이승만과 같은 영웅을 원하지 않는다. 오늘날 일본에 대한 증오를 매개로 대한민국과 미국을 증오하는 자들은 이승만을 증오함으로써 중국과 유교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일까.
최진덕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