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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눈] 전쟁을 시작하지 않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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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나 하노이 특파원

승인 : 2026. 04. 08. 06:12

INDIA ENERGY <YONHAP NO-6231> (EPA)
지난달 26일(현지시간) 인도 뭄바이의 한 가스 공급 대리점 앞에서 시민들이 빈 액화석유가스(LPG) 용기를 재충전하기 위해 줄지어 서 있다/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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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나 하노이 특파원
오토바이에 기름을 넣는 데 길어봤자 3분이면 족하다. 전쟁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습하고 호르무즈 해협이 막힌 뒤, 하노이 주유소 앞에 오토바이 행렬이 늘어섰다. 기름값이 더 오르기 전에 넣어야 한다며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3분짜리 주유가 40분이 됐다. 가장 심했을 때는 오토바이 5만동(약 2700원), 자동차 50만~80만동(약 2만7000~4만3000원)의 주유 금액 제한까지 걸렸다.

베트남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축이다. 자체 정유시설이라도 있으니까. 태국과 중국으로부터의 연료 공급이 막힌 라오스, 캄보디아에서는 연료가격이 비교적 저렴하고 재고가 남아 있는 베트남 국경지대까지 넘어와 주유를 한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이번 사태를 "역사상 가장 큰 에너지 공급 차질"이라고 규정했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원유와 LNG의 80% 이상이 아시아행이다. 원유의 90%를 중동에서 수입하는 필리핀은 해협이 봉쇄되자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정부 기관들도 주 4일 근무로 전환했다. 태국 치앙라이의 한 주유소에는 자동차 80~90대와 오토바이 수십 대가 줄을 섰다. 미얀마는 격일 운행을 실시하고 있다. 전쟁이 터진 지 39일. 중동에서 수천km 떨어진 곳들이 저마다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인도는 취사용 LPG의 60%를 중동에서 수입한다. 해협이 막히자 상업용 LPG 배분이 80%까지 삭감됐고, 뭄바이·벵갈루루·델리의 식당과 호텔이 문을 닫았다. 네팔은 빈 LPG 통을 절반만 채워주는 배급제를 시행하고 있고, 파키스탄은 연료를 아끼려고 프로 크리켓 리그를 무관중으로 돌렸다. 크리켓이 종교인 나라에서다. 방글라데시에서는 연료 절도와 주유소 습격이 이어져 사망자까지 나왔다.

이 나라들의 공통점이 있다. 전쟁을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쟁의 첫 폭탄을 떨어뜨린 것은 미국과 이스라엘이고,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한 것은 이란이다. 하노이의 그랩 기사, 벵갈루루에서 장작을 때우는 식당 주인, 방글라데시에서 연료를 지키다 목숨을 잃은 주유소 직원에게는 이 전쟁에 대한 한 표의 결정권도 없었다. 전쟁의 이유를 설명받은 적도, 동의를 요청받은 적도 없다. 그러나 전쟁값 청구서는 가장 먼저, 가장 크게 이들에게 날아왔다.

한국은 208일분의 전략비축유가 있다. 일본은 254일. 베트남은 20일이 채 안 되고 필리핀은 비상사태를 선포해야 할 정도다. 같은 전쟁, 같은 해협 봉쇄인데 견딜 수 있는 시간이 열 배 넘게 차이 난다. 전쟁이 가장 먼저 쓰러뜨리는 건 이렇게 비축할 여유가 없었던 나라들이다. 전쟁에서 가장 멀리 있고 전쟁에 대한 책임이 가장 없는 사람들이 가장 빨리 쓰러진다는 것, 이것이 21세기 전쟁의 가장 폭력적인 속성이다. 휴전 소식에 주가가 반등하는 월스트리트의 시간과, 주유소 앞에서 40분을 기다려 2700원어치를 넣는 하노이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전쟁을 시작한 사람들의 세계와 전쟁값을 치르는 사람들의 세계 사이에는 해협보다 넓은 간극이 있다.
정리나 하노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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