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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엽의 법과 경제] 지경학(geo-economic) 시대의 국제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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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6. 03. 26.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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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엽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자유무역과 국제규범의 시대가 열렸다고 믿었다. 미국 주도로 국제 평화와 인권을 지향하는 유엔이 출범했고, 브레턴우즈 체제와 GATT, WTO로 이어진 질서는 상호의존을 통해 평화와 번영도 함께 확대될 것이라는 기대 위에 세워졌다. 미·소 냉전의 긴장 속에서도 데탕트의 순간은 있었고, 냉전 종식 후에는 시장 개방과 민주주의의 확장이 거의 보편적 진리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지금 그 시대는 분명히 흔들리고 있다.

이번 이란 전쟁은 그 변화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 호르무즈 해협은 미국에 세계 에너지 가격을 관리할 수 있는 전략적 관문이다. 반면 중국은 이란과 중동을 에너지 안보와 유라시아의 연결로 보고 러시아는 미국의 중동 개입을 견제하면서 반미 질서를 넓히는 공간으로 활용하려 한다. 유럽은 명시적으로 미국의 동맹이지만, 동시에 전쟁 장기화가 초래할 에너지 가격 급등, 난민, 경기침체를 우려하고 있다. 이들의 에너지, 무역, 금융, 안보 목적이 다르므로 더 이상 동맹과 동참은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이제 강대국의 행동은 '지경학(geo-economic)'적으로 읽어야 한다.

지경학은 무역, 투자, 금융, 기술 같은 경제수단으로 지정학적 목표를 달성하려는 전략에 관한 학문이다. 지경학 시대의 국제질서는 가치와 규범만으로 움직이지 않는 특성이 있다. 거래 구조가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최근 클레이튼 예일대 교수, 마기오리 스탠퍼드대 교수, 슈레거 컬럼비아대 교수가 이코노메트리카(Econometrica)라는 경제학 최고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은 이런 현실을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이 논문은 국가 간 관계가 본래 완전계약이 불가능한 공간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국제질서에서는 모든 상황을 미리 준비해 놓을 계약서를 쓸 수 없고, 그것을 중립적으로 집행할 세계정부도 없으므로 긴장 완화가 유지되더라도 결국 이해관계에 따라 질서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런 세계에서 패권국은 경제적 이해관계를 이용해 위협 수단을 만들고, 자신이 직접 법적으로 지배하지 않는 외국 기업과 정부의 행동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미국이 이란을 제재하기 위해 유럽 금융기관들에 이란과의 거래를 끊도록 압박했고, 실제 유럽 은행들은 미국 금융망에서 차단될 것을 우려하여 자국법상 금지되지 않은 거래까지도 스스로 중단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미국이 필요할 때마다 우방국들에 호르무즈 해협과 같은 전략 공간에서 더 큰 역할을 요구해 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이런 패권국의 행동이 언제나 비효율적인 것만은 아니다. 무정부적 국제질서에서 누군가 집행자 역할을 맡으면 일정한 질서와 예측이 가능해진다. 약속 불이행의 위험이 줄고, 원래는 성립하기 어려웠던 경제활동이 가능해지기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꽤나 오래 유지된 배경 중 하나도 결국 미국이 이런 집행자 위치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패권국이 늘 중립적 심판으로 머물지 않는다는 데 있다. 패권국은 세계 경제의 효율을 높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의 지경학적 이익을 위해 질서를 왜곡할 수 있다. 미국이 유럽 정부와 기업들에 중국 화웨이 인프라 사용 중단을 압박한 일이나, 중국이 일대일로를 통해 무역과 금융 기회를 제공하는 대신 외교무대에서 정치적 지지를 요구하는 일이 그렇다. 경제적 이해는 협력의 기반이 되기도 하지만, 강대국의 레버리지로 바뀌기도 한다. 그 결과 경제적 효율은 희생되고 자원배분은 왜곡된다.

결국 지금 강대국들은 규범의 수호자가 아니라 경제 거래의 설계자라고 봐야 한다. 이 때문에 국제질서는 더 이상 전통적인 개념의 외교와 안보만으로 해석할 수는 없게 되었다.

예를 들어, 미군이 주둔하는 우리 한반도의 중요성 역시 지경학적인 관점에서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북한의 군사 위협 때문에 주한미군을 활용한다. 그러나 지경학 시대의 한반도는 북한을 겨냥한 억지력의 공간인 동시에, 미국이 중국의 군사적 영향력을 견제하고 동북아 질서에 개입하는 전진기지로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주한미군은 한국의 안보 자산이면서 동시에 미국의 전략 자산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한미군 비용에 대한 논쟁도 단순한 방위비 분담 문제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한반도가 향후 미국의 지경학적 레버리지로 활용될 수도 있 는 만큼, 한국 역시 동맹 속에서 가치보다는 거래를 고려함으로써 자국의 협상력과 전략적 자율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냉정하게 따져야 한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지인엽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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