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외길을 걸어온 두 원로 작가가 나란히 개인전을 열었다. 행위예술의 선구자 이건용(84)과 세필화의 대가 김홍주(81). 1970년대부터 각자의 화두를 붙들고 반세기를 달려온 이들의 전시장은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 앞에 선 두 구도자의 수행 현장처럼 보인다.
서울 한남동 페이스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이건용 개인전 '사유하는 몸'은 작가의 예술 활동 5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다. 1975년 백록화랑에서 처음 선보인 '동일면적', '실내측정' 같은 전설적 퍼포먼스의 기록 영상부터 '바디스케이프' 연작까지, 갤러리 3개 층 전체가 이건용의 사유 궤적으로 채워졌다. 그는 캔버스를 마주 보고 그리는 대신 등을 돌리고 선을 긋고, 결과를 예측하지 않은 채 신체의 범위와 조건을 드러내 왔다. 완성된 이미지보다 그 이미지를 만들어낸 조건과 사건 자체를 작품으로 삼아온 셈이다.
질문 듣는 이건용<YONHAP NO-4411>
0
이건용 작가. /연합뉴스
양손 열 개 손가락을 접었다 펴며 거리를 측정하고('손가락의 논리 1'), 팔꿈치에 깁스를 한 채 건빵을 먹으며 일상 행위의 의미를 되묻는('건빵 먹기') 그의 작업은 흔히 말하는 퍼포먼스라기보다 '이벤트'에 가깝다. 작가 본인은 이를 '논리적 사건'이라 부른다. 감정이나 표현을 최대한 배제하고, 규칙과 조건, 그것을 실행하는 신체만 남겼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것들에 대한 기록이다. '바디스케이프' 연작에서도 화면은 표현의 장이 아니라 몸의 움직임이 남긴 흔적의 총합으로 기능한다.
1970년대 한국에서 예술적 실험은 종종 정치적 의미로 해석되었고, 통제와 검열이 일상이었다. 이건용이 선택한 방식은 역설적이었다. 스스로 규칙을 설정하고, 그 안에서 신체를 움직이는 것. 통제의 구조를 외부에서 거부하기보다, 내부에서 드러내는 전략이었다. "통제의 메커니즘을 전복하는 것만이 변화된 삶의 공간에 나를 새기는 유일한 방법이었다"는 그의 말은, 당시 한국 실험미술이 신체와 일상의 행위를 통해 우회적으로 사유의 공간을 넓혀갔던 맥락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전시는 3월 28일까지.
이건용 퍼포먼스 건빵먹기 의 모습 페이스갤러리
0
이건용 퍼포먼스 '건빵먹기'의 모습. /페이스갤러리
글로벌세아그룹의 전시 공간인 삼성동 S2A에서 열리고 있는 김홍주 개인전 '김홍주: 표면에 남다'는 또 다른 종류의 집요함을 보여준다. 전시장에는 솜털처럼 가느다란 선을 반복해 쌓아 올린 세필화들이 걸렸다. 멀리서 보면 몽글몽글한 덩어리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무수한 선들이 겹겹이 엉켜 화면을 채우고 있다. 빠른 제스처나 강한 색채 대신, 거의 수행에 가까운 반복 행위를 통해 화면의 밀도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김홍주 표면에 남다 전시 전경
0
김홍주 개인전 '김홍주: 표면에 남다' 전경. /S2A
김홍주 역시 1970년대부터 유행과 거리를 두고 작업해 왔다. 자동차 문 창틀에 그림을 그리고, 거울과 창문을 화폭으로 삼아 회화와 사물의 경계를 지웠다. "그림이 액자에 들어가면 스크린이 되는데, 이 스크린을 없애버리려고 했다"는 그의 말처럼, 그는 캔버스를 고정하는 틀 자체를 의심해 왔다. 바탕 처리하지 않은 천 위에 부분적으로만 젯소를 바르고, 가장자리는 자연스럽게 말려 들어가도록 내버려둔 방식도 그 연장선에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세필화는 특정 이미지를 재현하지 않는다. 다만 작가가 쏟아온 시간과 손의 감각이 표면 위에 남아 있을 뿐이다. 관람객은 정해진 해석 대신, 선과 선 사이를 헤매며 저마다의 이미지를 발견하게 된다. 이번 전시는 1970년대 오브제 작업부터 세필화로 이어지는 김홍주의 대표작 17점을 통해 그 긴 사유의 궤적을 보여준다. 전시는 3월 14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