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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인사이트] 한국 경제발전 일등공신은 한국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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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11. 26. 17:57

-현대 경영의 뿌리는 미국 군대와 美 유학한 엘리트 장교들
-베트남전 참전과 중동 건설 진출이 한국경제 발전의 촉매제

장대성 교수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장군(당시 소장)이 군사혁명 일으켰을 때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 70달러, 실업률 25%에다 전국에 거지가 즐비한 세계 4번째 최빈국이었다. 하루 세끼를 못 먹는 사람들이 허다했다. 미국이 원조해 준 옥수수 가루로 만든 죽이 전국의 초등학교 학생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주었었다. 이랬던 나라가 지금 1인당 국민소득이 4만 달러에 육박해 일본보다 높고, 2025년 올해 예상수출액은 약 7000억 달러로 세계 6~7위의 수출대국이 됐다. 5·16 군사혁명 이후 미국 경영시스템을 가장 잘 아는 고급장교 출신들이 경제개발을 시작하면서 선진 경영시스템의 기초를 잘 구축했고, 대부분의 한국 남성 노동인력이 군대에서 교육과 훈련을 잘 받아 조직에 충성하고 근면하였기 때문에 이런 기적이 가능했다.

현대경영의 뿌리는 미국 군대경영이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에 주도적 역할을 해 전후 세계 최강대국이 되었다. 전쟁에서는 군대가 승리해야만 승전국이 된다. 그러므로 군대의 경영이 국가 생존을 위해 가장 중요하다. 제2차 세계대전 승리를 주도한 미국 군대의 전략, 전술, 작전, 인사, 조직, 정보, 대민 관리뿐만 아니라 공병, 통신, 병기, 병참 보급 그리고 품질관리 등의 방법과 기술을 전쟁 후 미국의 대기업들이 배우고 적용한 것이 현대경영이 되었다. 한국 군대는 해방 후 미국 군대가 도와 창설되었고, 6·25 전쟁 3년 동안 미국 군대와 함께 전쟁을 하면서 세계 최고의 경영조직인 미국 군대를 배워 한국 최고의 경영조직이 되었다.

1945년 8월 해방 당시 한국인들의 약 80%가 자기 이름도 한글로 못 쓰는 문맹자들이었다. 해방 직후 4개월 후인 1945년 12월에 미 군정청이 한국군 장교 양성 목적으로 군사영어학교를 설치하고 최초로 장교 후보생들을 약 200명 모집했다. 후보생들 학력이 대학 재학 및 졸업이 약 40~50%였고, 고등학교 졸업은 40% 정도여서 문맹자가 인구의 80%인 당시 장교 후보생들이야말로 한국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었다고 한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6·25전쟁 중인 1951년부터 미국과 협의하여 우수한 장교들을 선발, 미국 군사학교에 유학을 보냈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 직전인 1959년까지 약 1만명이나 되는 많은 장교들이 미국 군사학교에 유학해 미국 선진기술과 경영학을 공부하고 왔다. 박정희 대통령은 준장 시절인 1954년 미 육군포병학교에 유학했고,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1951년 대위 때 미 육군보병학교에서 유학했다.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은 휴전 후 1953년과 1959년에 미 육군보병학교와 행정학교에서 각각 유학해 경영학을 공부하고 귀국해 당시 한국에서 경영학의 1인자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박태준 회장은 포스코 창업 사장 시절 임원들에게 직접 미국경영학을 가르치며 경영을 지휘해 지금의 세계적인 철강회사인 포스코를 만들었다.

5·16 군사혁명 후 미국 유학을 한 고급장교와 장군들이 전역 후 정부조직은 물론 기업체들에 들어가 미국 경영시스템과 기술로 패전국 일본의 전체주의 경영시스템에 쩌든 한국의 모든 조직을 미국식으로 현대화하여 정부는 물론 기업들도 획기적인 경영성과를 달성하였다.

한국경제 기적의 꽃은 베트남전 참전과 중동 건설 진출이었다. 한국군은 베트남전에 1965년 파병되어 약 8년간 참전하였다. 당시 베트남에 파병된 고급장교들은 대부분 6·25 참전 장교들로 미군 경영시스템에 익숙했는데 베트남에서 미군과 합동 작전을 수행하여 새로운 경영방법을 더 배웠다. 그리고 주베트남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중장)은 미군에게 한국 건설업체와 운송업체를 소개하여 현대건설이 미군 공사를, 한진이 미군 보급품 수송을 맡게 했다. 이들은 한국기업으로는 처음으로 거액의 달러를 벌었고 후일 굴지의 재벌기업이 되었다. 그리고 베트남 주둔 한국군의 무기 이외의 거의 모든 군수 보급품을 미국 자금으로 한국에서 만들어 공급해 한국 내에서 제조업체들이 큰돈을 벌기 시작했다. 또한 파병 국군 장병들 전원이 한국보다 국민소득이 30배나 높은 미국의 장병들과 똑같은 급여와 전투수당을 받아 한국에 송금하여 달러가 귀하던 시절 대량의 달러가 들어왔다.

1973년 베트남전 종전 후에는 미국 육군공병단이 한국 건설업체들의 중동건설 진출을 많이 도와주면서 한국 건설업체들은 1970년 중반부터 1980년 중반까지 약 10년간 중동에 대대적으로 진출해 엄청난 오일 달러를 벌어들였다. 당시 중동건설 수출액은 한국 전체 수출액의 20~30%였고 중동 건설 인력 중 대다수가 베트남전 전투경험자였거나 군대에서 조직적인 교육과 훈련을 잘 받은 우수한 인력들이었다.

한국군대는 6·25 전쟁 때 불법 남침한 북한 공산군과 중국 공산군의 침략을 잘 막아 나라를 구했고, 휴전 후에도 용맹한 한국 해군과 공군이 3면의 바다와 하늘을 잘 지켜주어 후방에서 기업들이 안보 걱정 없이 열심히 사업할 수 있게 도왔다.

한국 군대를 통한 미국 경영방식의 전수, 그리고 한국경제 발전의 촉매제가 됐던 베트남전 참전과 중동건설 진출에 한국군대가 결정적 역할을 했던 점 등을 고려할 때 결론적으로 한국군대가 한국경제의 기적을 이루는 데 일등공신이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장대성 전 총장은…
University of Nebraska-Lincoln에서 경영학 석사와 박사를 취득했다. 경기대학교 경영학과 교수와 대학원장을 한 후 강릉영동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대한경영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국내외에 130편의 논문을 게재·발표했다. 조선일보에 '세종 회장과 충무공 사장'을 40회 그리고 '위클리 비즈'에 '제왕의 경영학'을 7회 연재했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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