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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기자의 스포츠 비즈니스] K리그, ‘잔류의 경제학’에서 ‘성장의 생태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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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10. 31. 16:56

구단의 장기 투자를 멈춰 세우는 '생존의 덫'
이제는 도시와 팬, 그리고 산업이 함께 커지는 구조를 지향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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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에디온 피스 윙 스타디움' 내부 전경. 도시 일상과 연동되는 축구전용구장 인프라 사례.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K리그1은 12팀 체제다. 12위가 자동 강등이고 10·11위가 승강 플레이오프여서, 대략 네 팀 중 한 팀이 시즌 초부터 강등 위험권에 놓인다. 긴장과 드라마를 보장하는 설계지만, 산업의 관점에서 보면 장기 투자 유인이 약해진다는 지적이 반복돼 왔다. 유소년 육성, 스카우팅 네트워크, 의무·데이터 시스템, 전용구장 같은 '긴 호흡'의 과제는 다음 시즌으로 미뤄지고, 하위권으로 갈수록 의사결정은 단기 처방으로 수렴한다.

◇ 리스크의 범위가 의사결정의 시간을 바꾼다

잔류가 전부인 해가 이어질수록 프런트의 KPI, 즉 관중, 매출, 스폰서 유치, 유소년 전환률 같은 경영 지표는 '살아남기 위한 보강'에 고정된다. 도시의 투자도 멈춘다. 지자체는 '내년에도 이 팀이 1부에 남을까'를 먼저 계산하고, 전용구장, 보조구장, 접근 도로 같은 장기 인프라 예산을 뒤로 미룬다. 민간 스폰서 역시 계약 단가에 '불확실성 할인'을 적용하고, 구단의 현금 흐름은 짧아지며 리스크 프리미엄이 높아진다.

강등 제도를 없애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같은 규칙을 유지한 채 팀 수를 늘려 위험을 분산하면, 리그의 성장 구조와 도시의 투자 속도 모두 달라질 수 있다. 강등 제도는 프로축구의 동력이다. 다만 위험이 지나치게 넓게 퍼지면 구단의 경영이 단기 대응에 갇힌다. 현 체제에서 '자동 강등 1 + 승강 PO 2'라는 위험 구간은 고정돼 있고, 母집단이 12로 작다 보니 위험 노출 비율이 25%까지 치솟는다.

같은 규칙을 유지한 채 팀 수를 늘리면 위험의 분포가 완화된다. 14팀이면 3/14, 16팀이면 3/16으로 내려간다. 이 차이가 현장에서 의미를 갖는 이유는 분명하다. 프런트의 KPI가 '6개월 잔류 솔루션'에서 '3~5년 성장 로드맵'으로 이동할 여지가 생긴다. 예산의 무게중심도 단기 외국인 보강에서 유소년 파이프라인, 스카우팅 네트워크, 메디컬·데이터, CRM 같은 내재화 항목으로 넓어진다.

하위권에서는 안전지향 전술과 단기 임대가 반복되는 장면이 낯설지 않다. 반대로 강등 위험이 완화되면 선수 기용의 폭이 넓어진다. 구단은 즉각적인 생존보다 미래를 염두에 둔 로테이션 운영과 전술 실험을 시도할 여유를 갖게 된다. 라커룸의 공기가 달라지고, '지금 당장'보다 '내년 봄'을 준비하는 선택이 설득력을 얻는다. 감독 교체의 빈도와 타이밍도 달라진다. 잔류 압력이 낮을수록 데이터팀과 메디컬팀의 연속성이 확보되고, 시도·학습·수정의 사이클이 한 시즌 단위로 작동할 가능성이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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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가사키 스타디움시티' 관람 동선. 경기장과 상업·숙박·커뮤니티 시설을 한 루트로 묶은 복합 운영 사례.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 도시의 투자와 산업의 파급 효과

도시의 투자 속도 역시 위험 구조에 민감하다. 하위권 구단이 해마다 강등권에 걸리면 지자체와 민간 파트너는 전용·보조구장, 주차·동선·접근성 같은 장기 설비 투자를 미루게 된다. 반대로 위험 노출 비율이 낮아지면 이러한 투자들이 '불확실성 할인'을 덜 받는다. 구단이 리그 잔류 가능성에 따라 도시의 예산 구조가 바뀌는 현실을 감안하면, 팀 수 확대는 단순한 경기 수의 증가가 아니라 도시의 투자 속도를 조정하는 경제적 장치이기도 하다.

팀 수 확대는 도시의 지도를 넓힌다. 상부 리그의 문턱이 완만해질수록 참여 권역이 늘고, 더비의 밀도와 지역 스폰서 풀도 다양해진다. 전용구장 논의는 좌석 규모를 넘어 주말 동선과 체류 설계로 확장되고, 경기장과 인근 생활권을 잇는 프로그램이 중요해진다.

일본 나가사키의 경기장 복합개발은 그 방향을 보여준다. 경기장과 상업, 숙박, 업무, 아카데미를 하나의 동선으로 묶고, 비경기일에는 투어, 커뮤니티 클래스, 야외 상영, 로컬 마켓 같은 프로그램으로 '경기 없는 날'을 채운다. 관람이 끝나도 식사, 산책, 체험으로 체류가 이어지고, 주말마다 같은 루틴이 반복되며 지역 스폰서와 이벤트가 함께 굴러간다. 결국 팀 수 확대는 도시의 지도를 넓히는 일일 뿐 아니라, 리그 운영의 새로운 표준을 심는 과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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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월드컵경기장 서포터석 전경. FC서울 홈경기 응원석이 촘촘히 채워진 모습.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 팬 여정의 확장과 지역경제의 순환

참여 도시가 많아지면 각 지역에서 '가볼 만한 경기'의 빈도와 선택지가 커진다. 이를 뒷받침하려면 멤버십 운영과 좌석 정책, 경기 전·후 체류를 유도하는 간단한 프로그램 등을 지역 여건에 맞게 단계적으로 정비할 필요가 있다.

제주SK FC는 원정 팬 배려에 공을 들이고 있다. 경기장 주변 상권에 '원정 팬 환영' 안내물을 걸도록 지역 상인회와 협업하고, 일부 업장은 경기 일정에 맞춰 영업시간을 조정하거나 단체 좌석을 비워둔다. 항공·숙박 이동이 필수인 제주 특성상 '당일치기' 관람이 어렵기 때문이다. 구단은 이러한 제약을 줄이기 위해 원정 관람 안내를 강화하고, 지역 상권과 교통 편의를 연계한 협력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핵심은 '누가 더 많이 왔나'보다 '얼마나 오래 머물렀나'다. 체류 시간은 곧 도시 매출 시간으로 환산되고, 로컬 브랜드와의 결합도가 높을수록 지속적인 축적이 가능하다.

스폰서십의 구조도 달라진다. 중앙 대형 스폰서에 더해 생활권 단위의 지역 스폰서 포트폴리오가 두터워지면, 경기력 변동과 무관하게 리그의 체력이 안정된다. 참여 도시가 늘수록 지역 기업에 제공할 가시성과 소비 접점이 늘어나고, 시즌 패키지 외에 더비·지역 테마형 상품을 구성하기 쉬워진다. 효과 측정은 단순 노출 시간을 넘어 현장 체류, 재방문, 구매 전환, SNS 확산 등 다층 지표로 옮겨가야 한다. 팀 수 확대는 이런 평가 체계의 표준화를 리그 전체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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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SK FC 홈구장 인근의 '원정 팬 환영' 안내 배너. 일부 상권에서 원정 관람객 환영을 알린 사례.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 전환 로드맵과 운영 원칙

해법은 속도보다 순서다. 단번의 팽창은 리스크가 크다. 팀 수 확대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경기 수나 대진 방식이 아니라, 리그 운영의 기준과 방향을 어떻게 정비하느냐다.

신규·승격 구단의 진입 품질을 담보해야 한다. 재무 건전성, 경기장 인프라, 유소년 시스템, 행정·데이터 운영 역량 등 기본 조건을 단계적으로 강화해 상위 리그 진출이 단순한 '승리의 결과'가 아니라 '준비된 성장'이 되도록 해야 한다.

운영의 지속 가능성도 확보해야 한다. K리그는 중앙 배분금이 크지 않고, 구단의 재정 기반도 기업형과 시민형으로 다르다. 중요한 것은 인위적인 재정 개입이 아니라, 각 구단이 자율적으로 재원을 순환시킬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연맹은 재무 공시, 예산 투명성, 유소년·지역 프로그램의 투자 효율을 점검 지표로 삼아 운영의 신뢰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

또한 경기 운영과 정보 관리의 투명성 강화도 필요하다. K리그는 경기 일정, 중계 품질, 시설 점검 등 주요 운영 체계를 정례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앞으로는 중계·데이터·기록 시스템을 통합 관리하는 플랫폼을 강화해 경기 외적 운영이 산업 경쟁력으로 이어지게 해야 한다. 리그가 보다 투명하고 접근하기 쉬운 구조가 될 때, 팬과 시장은 그 과정을 신뢰하게 된다.

공동 조달과 협력 모델은 비용 격차를 줄이는 현실적 대안이다. 숙박, 보안 등 실무 항목을 연맹 차원에서 묶어 공동 협상을 검토하면 중소 구단의 원가 부담을 완화할 수 있다. 이는 실무 협의체 단위에서 시범 추진해 볼 만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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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종료 후 팬과 소통하는 수원삼성 선수단. 현장 교류가 재방문과 체류 확대로 이어질 수 있는 접점.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 리그는 경기를 파는 조직이자 도시를 알리는 플랫폼이다

팀 수 확대는 단순히 경기 수를 늘리는 문제가 아니다. 리그의 시간축을 바꾸고, 산업의 기반을 재설계하는 일이다. 리스크가 완화되면 구단의 시계는 '잔류의 경제학'에서 '성장의 설계'로 이동한다. 도시는 경기장을 중심으로 주말의 경제를 확장하고, 팬은 더 많은 도시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난다. 하부 리그의 에너지가 상부 리그로 흡수될 때, 한국 축구는 마침내 피라미드의 순환 구조를 완성하게 된다.

팀 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단순한 숫자의 변화가 아니다. 더 많은 지역이 '우리의 경기'를 세상에 내보낼 수 있다는 뜻이다. 경기장의 조명은 도시의 상징이 되고, 한 주의 일정은 경기 일정에 맞춰 흐른다. 리그가 커진다는 것은 곧 팬과 도시의 시간이 함께 커진다는 의미다.

지금 필요한 것은 속도보다 방향이다. 급격한 팽창이 아니라, 공개된 지표와 합의된 순서 속에서 쌓이는 신뢰다. 그 신뢰 위에서만 장기 투자가 가능하고, 팬은 리그의 성장 서사를 믿게 된다.

12팀의 틀을 넘어 16팀 시대의 지형을 설계하는 일은 숫자를 늘리는 일이 아니라 시간을 확장하는 일이다. 리그의 크기는 단순히 팀 수로 측정되지 않는다. 그 안에서 도시와 팬, 그리고 산업이 함께 성장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한국 축구는 이제 '잔류의 경제학'을 넘어 '성장의 생태학'으로 나아가야 한다.
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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