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던지는 질문, 진실은 언제나 상대적이다
부유하는 기억의 파편 속에서, 멈춰 있던 시간과 마주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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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고수희가 연출명 '나옥희'로 옮긴 이 작품은 단순한 추억담이 아니다. 고등학교 시절의 화재 사고라는 하나의 사건을 축으로, 서로 다른 시선과 목소리가 겹치고 충돌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의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편한 사실을 조용히 드러낸다. 작품은 '상대적'이라는 단어처럼 어느 누구의 기억도 완전히 옳지 않고, 어느 누구의 감정도 전적으로 틀리지 않음을, 날카로우면서도 차분한 호흡으로 관객에게 전한다.
무대의 첫인상은 강렬하다. 중앙에는 벤치가 놓여 있고, 그 주변으로 여러 개의 비석이 둘러서 있다. 장식은 거의 없지만, 공간은 결코 비어 있지 않다. 벤치는 인물들의 대화와 갈등이 교차하는 중심축으로 자리 잡고, 비석들은 오래된 기억의 파편처럼 고요히 서 있다. 은은한 조명은 과장되지 않지만 배우들의 호흡과 동선을 따라 미묘하게 결을 달리하며, 무대에 살아 있는 긴장을 불어넣는다. 공연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 정제된 공간은 이미 관객에게 무언의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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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모오는 화재의 원인이 자신의 담배 때문이라는 죄책감에 스스로를 가둔 인물이다. 현재 회사 돈을 빼돌린 추락한 현실도 결국 과거의 원죄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으며 자신을 옭아맨다. 세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타입"이라고 말하지만, 경박한 농담과 가벼운 몸짓 속에는 도망쳤다는 오해를 풀지 못한 채 살아온 지난날의 무게가 서려 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직선적이지 않다. 짧고 날카로운 대사와 긴 침묵이 교차하며 공기를 팽팽하게 당기고, 관객은 그 긴장에 자연스럽게 끌려 들어간다.
죽은 자들의 존재는 오히려 산 자보다 생생하다. 억울한 죽음의 기억에 갇힌 채 집요하게 진실을 확인하려는 토오야마, 형을 향한 순수한 애정으로 무대를 따스하게 물들이는 타츠오. 그들은 단순한 유령이 아니다. 여전히 살아 있는 감정의 화신처럼 무대를 가득 채운다. 토오야마의 날 선 목소리와 타츠오의 낮고 부드러운 톤이 교차하는 순간,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무너지고, 무대는 하나의 부유하는 세계로 변한다.
여기에 감시자 노무라는 일종의 균형추로 작동한다. 그는 죽음의 질서를 설명하며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무너질 때의 대가를 상기시키는 존재다. 덕분에 초현실적인 설정이 허공에 흩어지지 않고, 이야기의 긴장과 개연성이 단단히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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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의 힘은 인물 간의 긴장과 균형을 유지하는 데서도 빛난다. 토모오와 세키, 그리고 죽은 자들 사이의 공방은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다. 인물의 감정을 설명하는 대신 침묵과 호흡으로 내면을 드러내는 방식은, 과잉을 덜어내면서도 감정의 결을 오히려 더 선명하게 만든다. 덕분에 관객은 단순히 사건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고통과 욕망을 함께 체감한다.
이야기의 긴장은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날카롭게 고조된다. 죽은 자들이 산 자의 삶에 개입할수록 현실은 꼬이고, 결국 모든 것이 무너진다. 토모오의 비리와 세키의 비밀스러운 관계가 드러나면서 두 사람의 삶은 벼랑 끝으로 몰린다. 그러나 이 붕괴는 절망으로만 남지 않는다. 무너진 자리에서 비로소 멈춰 있던 시간을 마주할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토모오와 세키는 20년간 붙잡고 있던 과거를 서서히 내려놓는다. 죄책감과 원망, 두려움과 분노의 감정을 놓아주고, 마침내 죽은 친구와 동생을 떠나보낸다. 이 과정은 화려한 화해나 감정의 폭발로 포장되지 않는다. 대신 오래 묵힌 감정이 조용히 풀려나가는 듯한 고요한 울림이 객석을 감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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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상대적 속세'는 화려하지 않다. 대신 철저한 절제와 치밀한 밀도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배우의 움직임과 대사의 리듬, 조명과 정적의 호흡은 나옥희 연출의 세밀한 계산 아래 하나의 유기적 흐름으로 엮여, 무대에 숨을 불어넣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긴장과 여백은 공연이 끝난 뒤에도 오래 마음속을 울린다.
'상대적 속세'는 말한다. 삶과 죽음, 기억과 현실의 경계는 언제나 흐릿하며, 우리가 붙잡고 있는 진실은 결국 시선의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한 조각일 뿐이라고. 객석을 나서는 순간, 관객은 자기 안에 잠들어 있던 시간과 마주선다. 그 기억이 불편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며 받아들일 때 비로소 현실은 조금 다른 결을 띤다. 이 작품은 해답을 내놓지 않는다. 대신, 흔들리는 세계 속에서 스스로 균형을 찾고 그 떨림을 견뎌내는 법을 조용히 일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