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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눈] ‘필리핀 히틀러’ 두테르테의 체포가 던지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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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나 하노이 특파원

승인 : 2025. 03. 18. 07:00

WARCRIMES-PHILIPPINES/ <YONHAP NO-0636> (REUTERS)
14일(현지시간) 필리핀 마닐라에서 '마약과의 전쟁'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이 국제형사재판소(ICC)에서 진행된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의 첫 법정 출석을 생중계로 지켜보고 있다/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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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투데이 정리나 하노이 특파원 = 세계 각지의 뉴스를 접하다 보면 개중에는 '설마, 정말 이렇게 말했다고?' 경악하며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동남아 담당 기자에겐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이 압도적 1위를 차지한다.

그는 대통령 취임 후 2016년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해 마약 복용·판매 용의자가 투항하지 않으면 경찰이 사살할 수 있도록 했다. '히틀러'라는 비난이 나오자 그는 오히려 "히틀러는 유대인 300만명을 학살했다. 필리핀에 있는 마약 중독자 300만명을 학살하면 기쁠 것 같다"고 말했다. 재판 없는 즉결 처형에 국가가 면죄부와 포상금까지 준 결과 초법적 살인이 자행됐다. 무고한 시민을 포함한 사망자는 필리핀 정부 추산 6000여명, 국제사회 추산 2만~3만명이다.

필리핀의 히틀러를 자청했던 그는 지난 11일 마닐라 국제공항에서 체포돼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형사재판소(ICC)로 압송됐다. 대통령 시절 ICC가 '마약과의 전쟁'의 반인도적 살상 혐의를 조사하자 이에 반발하며 ICC 탈퇴까지 강행했던 두테르테는 결국 아시아 전직 지도자로서는 최초로 ICC 법정에 서게 됐다.

'정의 실현'처럼 보이는 이번 체포 이면에는 대물림하는 왕조 정치와 유력 가문 간 권력 투쟁으로 점철된 필리핀 정치의 그늘이 드리워져있다. 두테르테가 체포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두테르테 가문의 정치적 동맹이었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현 대통령이 두테르테 가문과 갈등이 깊어지자 태도를 바꿔 ICC 체포영장 집행에 협조했기 때문이다. ICC는 자체 경찰력과 강제력이 없어 가입국의 자발적 협조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 탓에 지난해 반인도주의 범죄·전쟁 범죄 등의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된 푸틴 러시아 대통령·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흘라잉 미얀마군 총사령관은 여전히 자유롭게 활동 중이다. 하지만 두테르테는 체포영장 발부 직후 곧바로 ICC에 넘겨졌다.

필리핀에선 유력 정치인이 체포되더라도 제대로 처벌받는 경우도 드물다. 현 마르코스 대통령은 1986년 피플 파워로 축출된 독재자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이다. '사치의 여왕'으로 불린 어머니 이멜다 마르코스는 징역 77년형을 선고받았지만 버젓이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부패 혐의로 유죄를 받았던 조셉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은 마닐라 시장 연임까지 했고 두 아들은 상원의원이다.

이처럼 부정부패와 함께 대물림되는 필리핀의 정치권력은 '마약과의 전쟁' 희생자들이 자국의 사법 체계 대신 ICC로 향한 이유가 됐다. 두테르테가 ICC 법정에 서게 된 것은 분명 중요한 진전이지만, 국가가 자국 내에서 발생한 범죄를 심판하지 않으려 할 때 개입하는 ICC가 나섰다는 점 자체가 필리핀 정치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셈이다.

두테르테와 '마약과의 전쟁'은 그의 재임 당시 75~88%에 달하는 높은 지지를 받았다. 당시만 해도 필리핀 국민은 '마약과의 전쟁' 대상이 될까 두려워하면서도 '필리핀을 위한 조치'란 명분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필리핀 사회는 '더 큰 선을 추구하기 위한 필요악'이라며 체제적 폭력을 용인하고 침묵했다. 그리고 그 책임마저도 스스로 묻지 못하고 ICC에 넘기게 됐다.

두테르테의 체포는 필리핀을 넘어 국제사회와 우리에게도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체제적 폭력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필요악이라는 명분 아래 폭력을 용인했던 과거를 돌아볼 준비가 돼 있는가', 그리고 '정치적 계산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진정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두테르테의 사례가 보여주듯 정의는 언제고 정치의 도구로 쓰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정의를 어떻게 바로 세울 것인가?
정리나 하노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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