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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55> 문주란 시대의 서막 ‘동숙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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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3. 09. 17. 17:30

'너무나도 그 님을 사랑했기에/ 그리움이 변해서 사무친 미움/ 원한 맺힌 마음에 잘못 생각에/ 돌이킬 수 없는 죄 저질러 놓고/ 뉘우치면서 울어도 때는 늦으리/ 음~ 때는 늦으리// 님을 따라 가고픈 마음이건만/ 그대 따라 못 가는 서러운 이몸/ 저주받은 운명에 끝나는 순간/ 님의 품에 안기운 짧은 행복에/ 참을 수 없이 흐르는 뜨거운 눈물/ 음~ 뜨거운 눈물'

'동숙의 노래'는 경제성장을 위해 너나없이 허리를 졸라매었던 1960년대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대다수 국민들이 가난했던 그 시절이었다. 남자들은 중동 건설현장이나 월남전에 나가 외화를 벌어들였고, 여자들은 독일 간호사로 파견되어 온갖 궂은일을 다하거나 전국의 공단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특히 초등학교조차 겨우 졸업한 여공들의 고단한 일상은 눈물겨운 것이었다.

우리가 오늘 이렇게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고 한류의 위상을 자랑할 수 있는 것도 지난날 '동숙'과 같은 숱한 우리의 딸과 누이들이 못 배운 서러움과 사회적인 냉대 속에서 숙명처럼 흘린 피와 땀 덕분일 것이다. 이른바 '공순이'라는 이름으로 희뿌연 공장의 불빛을 지켜온 대가로 가족을 부양하고 동생들 학비를 보태던 그녀들의 헌신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동숙의 노래'는 그런 시대의 아픔을 웅변한다.

이 노래는 어느 비극적인 사연이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가난한 농부의 딸인 동숙은 서울의 가발공장에 다니며 시골 부모의 생활비와 동생 학비를 보내고 있었다. 국어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었던 동숙은 더 늦기 전에 공부를 하려고 검정고시학원에 등록하면서 그 학원 강사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순진한 그녀는 장래를 약속한다는 남자에게 모든 것을 다 내어주면서도 행복했다.

강사의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말에 그동안 모아뒀던 돈을 병원비로 다 내어놓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이 다니던 공장마저 문을 닫는 처지가 되었는데, 사랑했던 남자 또한 알고 보니 약혼녀가 있었다. 배신감을 이기지 못한 동숙은 그 학원 강사를 칼로 찌르게 되고 결국 살인미수죄로 철창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는 얘기다. 이것이 '동숙의 노래' 가사가 만들어진 배경이라는 것이다.
당시 비슷한 치정사건이 신문 지면에 등장한 것은 사실이다. '동숙의 노래'의 탄생 비화 또한 여러 차례 방송을 타기도 했다. 그러나 진실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훗날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 문주란마저 관련 증언을 번복했고, 정작 작사가 한산도의 정확한 의견 표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노랫말과 얽힌 안타까운 사연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문주란에 대한 관심도 폭증했다는 것이다.

작사와 작곡 그리고 노래가 삼위일체의 압권을 이루며 '동숙의 노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타인들' '내 몫까지 살아주' '돌지 않는 풍자' '공항의 이별' '그 사람' 등으로 이어지는 문주란 시대를 여는 서곡이었던 것이다. 문주란은 당시 국내 최저음 여가수였다. 아담한 체구와 인형 같은 외모에서 흘러나오는 매혹적인 중저음 허스키 보이스에 놀란 작곡가 백영호가 그녀를 전격 스카우트할 정도였다.

이미자의 후속 주자로 문주란을 지목한 백영호가 특유의 음색을 살린 데뷔곡을 작곡한 것이 바로 '동숙의 노래'였다. 10대의 어린 나이에 파격적인 데뷔를 한 문주란은 숱한 화제를 모으며 일약 스타가 되었지만 삶은 평탄하지 못했다. 노래 속의 '동숙'이 빙의라도 된 듯 적잖은 사건과 사고에 휘말리며 독신생활을 이어왔다. 하지만 문주란 노래의 특별한 감성은 지금껏 대중의 가슴에 긴 여운을 드리우고 있다.

/조향래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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