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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으로서는 무역은 선진기술 흡수통로이고, 세계 시장은 혁신을 강제하는 채찍
-호르무즈 해협의 선박 억류 사태는 한강의 기적을 가능케한 '항행의 자유'란 대전제 위협
호르무즈 해협의 선박 억류로 400년 동안 지켜온 '자유항행'의 원칙이 도전을 받고 있다. 2026년 4월 12일 기준 호르무즈 해협 인근에는 약 3200척의 선박이 발이 묶여 있으며, 그중에는 한국 경제의 혈맥을 담당하는 국적선 26척이 포함되어 있다. 유조선부터 자동차 운반선까지, 우리 수출입의 핵심 자산들이 이란의 '톨게이트화' 전략에 인질로 잡혀 있는 것이다. 평시 하루 125척이 넘던 통행량은 10여 척 수준으로 급감했고, 이란은 척당 수십억 원의 통행료를 요구하며 국제 공해를 사유지화하고 있다. 수출입으로 먹고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대한민국으로서는 당장의 원유 확보를 넘어 '항행의 자유' 원칙을 지켜내는 과제를 던지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지금의 호르무즈 해협 상황을 1609년 휴고 그로티우스가 '자유로운 바다(Mare Liberum)' 원칙을 제창한 이래 약 400년 만에 닥친 퇴행적 위기로 규정한다. 국가 권력이 조직적으로 공해상의 항행권을 박탈하고 사적 이익을 취하는 것은 근대 해양법이 확립된 이후 전례를 찾기 힘들다. 좁게는 1980년대 '유조선 전쟁' 이후 38년 만의 비극이지만, 넓게는 2차 세계대전 이후 80년간 세계 번영을 지탱해 온 '자유주의 국제 질서'의 붕괴를 의미한다.
이란이 장기적으로 호르무즈 해협의 항행을 봉쇄하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하겠지만 이란이 이를 톨게이트화하려는 움직임은 나타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협상 전략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엇갈린 메시지들을 내보냈다. '항행의 자유'를 막는 이란에 강력하게 경고하기도 했지만 톨게이트화를 고려해 보는 듯한 메시지를 내기도 했다.
항행의 자유와 관련한 경제학의 주제는 무역이다. 자원도 자본도 없던 빈국이 불과 반세기 만에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올라선 '한강의 기적'은 전 세계 경제학자들의 연구 대상이다. 한국 경제학계에서는 대표적으로 좌승희 박사가 수출실적이 좋은 기업에 금융과 세제상의 혜택을 집중한 '관치 차별화'를 핵심 동력으로 분석한 반면, KDI국제대학원 유정호 박사는 '대외 지향적 발전 전략'에서 그 핵심동력을 찾았다.
유정호 박사의 논지는 명확하다. 한국이 가난을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좁은 내수 시장의 울타리를 과감히 넘어, 세계 무역이라는 거대한 바다에 배를 띄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무역은 단순히 재화를 주고받는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선진 기술을 흡수하는 통로이자, 국내 기업들을 세계 시장이라는 혹독한 시험대에 세워 혁신을 강제하는 채찍이었다. 즉, 한국의 성장은 전 세계 바닷길이 열려 있고, 누구나 자유롭게 그 길을 이용할 수 있다는 '항행의 자유'라는 전제 조건 위에서만 가능했던 결과물이다. 하지만 호르무즈 해협에서 벌어지고 있는 초유의 선박 억류 사태는 한국 경제를 지탱해 온 이 대전제를 흔들고 있다.
그동안 우리에게 바다 항행은 '공짜'였다. 미국이 주도한 안보 우산 아래서 우리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도 전 세계 바다를 내 집 앞마당처럼 오갔다. 그러나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는 말이 있는데 '항행의 자유'도 공짜가 아닌 시대가 도래했다는 분석이 많다. 유정호 박사가 강조한 '세계 무역의 흐름'에 계속 올라타기 위해서는 이제 세계 물류의 통로를 지켜내는 일이 매우 중요해진 것이다.
한국에 호르무즈는 단순한 해협이 아니라 '에너지 생명선' 그 자체다. 현재 국내 에너지 비축량은 한 달 치도 남지 않은 위험 수위에 도달해 있다. 이제 우리 상선이 지나는 모든 바닷길을 어떤 방식으로는 지켜낼 필요가 있다. 항행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다국적 함대 구성에 대한 실질적 기여는 물론, 우리 선박을 스스로 호송할 수 있는 군사적 역량과 외교적 결단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는 우리 번영의 근간을 지키기 위한 실존적 선택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호르무즈 위기는 한국 경제에 던져진 거대한 시험지다. 우리 경제 성장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우리가 세계 시장의 흐름에 올라탔을 때 우리가 얼마나 빠르게 위대해질 수 있는지를 증명했다. 이제는 그 흐름을 유지하고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직접 항행의 자유 확보에 나서야 할 때다. 항행의 자유는 더 이상 국제 사회가 베푸는 시혜가 아닌 시대가 도래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그것은 우리가 비용을 지불하고, 외교적 역량을 투입하며, 때로는 다국적군에 참여해서라도 반드시 쟁취해야 할 '생존의 권리'다. 무역으로 일어선 나라, 이제는 그 무역의 길을 스스로의 힘으로 지켜내야 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그것이 개방 경제 성장모델을 진정으로 완성하는 길일 것이다.
김이석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