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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트로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Intermezzo)을 듣는다. 음악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온하게 시작된다. 현악기의 선율은 안개처럼 조용히 번지며 오후의 노곤한 공기 속으로 부드럽게 이어진다. 그 흐름에 몸을 맡길수록 이미 지나가 버린 슬픔이 가슴 밑바닥으로 스며든다. 서정적인 곡조의 이면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이 흐르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서려 있다. 눈을 감으면 바이올린의 선율을 타고 지구촌 곳곳의 비극적인 장면들이 겹친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 위에 멈춰 선 사람들, 방향을 잃은 눈빛들, 말끝을 삼키는 침묵들. 그 절망의 음향 위로,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부와 권력, 명예를 좇는 탐욕의 풍경이 겹친다. 세상은 더욱 아득해지고, 누군가는 절박하게 무언가를 외치지만, 그 목소리는 닿지 않는다. 인간이 연출하는 이 세계의 화면은 자극과 소음으로 가득하건만, 정작 우리가 들어야 할 본질의 비명은 거세돼 있다. 감각은 무뎌지고, 우리는 이해하는 척할 뿐 더 이상 타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그 공허함을 응시하다가 영화 '대부 3'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린다. 시칠리아의 거대한 마시모 극장, 그 육중한 사암 돌계단 위로 오페라 공연이 끝나고 화려한 조명 뒤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찰나 총성이 울린다. 평생 어둠의 세계를 지배하며 가족을 지키려 했던 늙은 제왕 마이클 코를레오네, 그가 그토록 원했던 '합법적인 세계'로의 탈출을 상징하던 딸 메리가 그의 눈앞에서 총탄에 관통당한다. 빛바랜 역사의 숨결이 배어있는 차가운 돌계단 위로, 메리는 "아빠"라는 짧은 외마디와 함께 힘없이 꺾인다. 마이클은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버린다. 그는 입을 벌려 하늘을 향해 온 힘을 다해 절규하지만, 스크린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는다.
감독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의도적으로 현실의 모든 소리를 지워버린다. 그 숨 막히는 진공의 공간을 오직 마스카니의 간주곡만이 처연하게 채운다. 시간이 찢어지듯 늘어지고, 터져 나오지 못한 감정은 공중에 위태롭게 매달린다. 그 '침묵의 비명'은 단순한 연출을 넘어,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극한의 고통 앞에서 언어라는 도구가 완전히 파산했음을 증명한다. 평생 타인의 생사를 결정해 온 절대 권력자가 정작 가장 사랑하는 딸을 잃은 순간, 세상은 그에게 소리를 지를 권리마저 박탈한 것이다. "죄는 불행을 낳고, 그 불행은 무고한 이들에게 떨어진다"라던 영화 속 마이클의 뒤늦은 깨달음은 차가운 돌계단 위에 선명한 핏자국으로 남는다. 이 장면이 가슴 깊이 각인되는 이유는 비극의 크기가 아니라, 비극이 음악으로 번역되는 방식 때문이다. 총성이 멈춘 자리에 흐르는 오페라 선율은 한 개인의 절규를 보편적인 비극의 형식으로 승화시킨다. 스스로 쌓아 올린 질서가 자신을 파괴하는 순간, 인간은 비명을 지르는 법조차 잊는다. 영화는 삶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오페라로 치환한다. 무대 위 가상의 비극과 무대 밖 코를레오네 가문의 잔혹한 현실은 간주곡의 선율 안에서 하나로 직조된다. 음악은 비극이 폭발하는 찰나보다, 그 폭발을 잉태한 이전의 시간과 모든 것이 사라진 이후의 공허를 붙잡는다. 그리하여 개인의 고통은 음악을 타고 인간 전체의 숙명적인 비애로 확장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명이, 비로소 음악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음악이 잦아들고 다시 눈을 들어 뜰을 바라본다. 봄은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화롭다. 연둣빛은 초록으로 더욱 짙어지고 꽃들은 여전히 소리 없이 피어난다. 이 찬란한 고요 속에서 나는 묻는다. '이 평온은 진실인가, 꿈인가.' 우리가 듣지 못하거나 외면하는 수많은 비명이 저 화사한 봄볕 아래 스며 있지 않은가.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우리 주변엔 갑작스러운 상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망연자실 서 있는 이들이 많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홀로 불행을 감내하는 침묵의 고통, 그들의 슬픔은 요란하지 않기에 우리는 너무나 쉽게 지나친다. 하지만 그 소리 없는 절규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가장 정직하게 마주해야 할 이 시대의 '인터메조'다. 신록의 향연 속에서, 눈부신 봄빛이 마스카니의 간주곡처럼 들리지 않는 인간의 고통을 말없이 감싸안고 있다. 대지는 함구하지만, 그 침묵이야말로 가장 깊은 위로의 연주다. 훗날의 역사가들이 이 시대를 기록할 때, 수많은 언어 대신 이 간주곡을 들려줄지도 모른다. 인간의 탐욕과 증오, 그럼에도 끝내 포기하지 못한 사랑과 그로 인한 파국을 설명하는 데 긴 문장은 사치일 수 있다.
분노와 살육이 뒤엉킨 머나먼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대화와 상생을 잃고 증오로 얼룩진 국내 정치의 소란 속에서도 어김없이 봄은 당도했다. 들리지 않는 절규 위로 자연은 오늘도 청신한 생명의 음률을 조용히 변주한다. 우리는 그 음악을 온전히 듣고 있는가. 지금 저 마당의 초목들이 온몸으로 인터메조를 연주하고 있다. 비극이 음악이 되고, 그 음악이 다시 고요한 위로가 되는 사월의 역설, 그 슬픈 아름다움이 우리 곁에서 가만히 무르익고 있다.
윤일현 (시인·교육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