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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례는 위기를 일시적으로 넘겨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전략의 기준을 재설정하는 조건으로 받아들일 때 선택의 방향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보여줍니다. 후퇴가 불가능하다는 전제를 받아들인 순간, 대응 방식 역시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같은 문제의식은 정몽진 KCC 회장의 올해 신년사에서도 확인됩니다. 정 회장이 가장 먼저 꺼내 든 키워드는 '퍼마크라이시스(Permacrisis)'였습니다. 위기를 일시적인 국면이 아니라 상시적인 조건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의미로, 기존의 대응 방식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글로벌 경기 둔화와 지정학적 리스크, 원자재 가격 변동성, 산업 구조 변화가 동시에 이어지는 상황에서 과거처럼 위기를 일시적인 변수로 인식해 대응하는 방식에는 분명한 제약이 따릅니다. 특정 위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접근 자체가 더 이상 성립하기 어려운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신년사 전반을 살펴보면 정 회장은 단기적인 실적 변동보다 구조와 경쟁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외형 확대나 단기 성과 중심의 전략에서 벗어나, 중장기적으로 버틸 수 있는 체질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입니다.
이 같은 기조는 해외시장 전략에서도 이어집니다. 정 회장은 해외시장 개척을 주요 과제로 제시하면서도, 단순한 수출 확대보다는 지역·산업별 전략과 핵심 고객을 명확히 설정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글로벌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모든 영역을 포괄하기보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취지로 읽힙니다.
해외 자회사와 글로벌 실리콘 계열사인 모멘티브와의 협업을 언급한 대목도 같은 맥락입니다. 각 법인과 사업 부문이 개별적으로 움직이기보다, 기술과 고객·시장 정보를 유기적으로 연계해 글로벌 사업의 효율성과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구상입니다. 외형 확대보다 사업 구조를 정비하는 데 방점을 찍고 있다는 점에서 퍼마크라이시스 인식과 맞닿아 있습니다.
기술 경쟁력에 대한 강조 역시 신년사에서 빠지지 않았습니다. 정 회장은 AI 기술을 접목한 연구개발과 생산 혁신을 통해 경쟁자가 쉽게 따라오기 어려운 '초격차' 영역을 구축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단기적인 비용 절감이나 효율 개선을 넘어, 핵심 기술과 역량을 내부에 축적하지 않으면 상시화된 위기 환경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반영된 대목입니다.
아울러 글로벌 시장에서 협력과 경쟁의 경계가 빠르게 변화하는 만큼, 기존의 관성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한 전략적 판단이 필요하다는 점도 언급됐습니다. KCC를 둘러싼 다양한 협력 관계 역시 경쟁력 관점에서 재검토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입니다.
종합해 보면 정 회장이 신년사에서 퍼마크라이시스를 강조한 것은 위기 자체를 부각하기보다, 위기를 전제로 한 경영 판단의 기준을 분명히 하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신년사라는 형식상 표현은 절제돼 있었지만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위기를 전제로 준비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다음 국면을 논하기 어렵다는 인식입니다. 결국 관건은 선언이 아니라 실행이며, KCC가 이 기준을 실제 경영에 어떻게 반영할지가 향후 행보를 가를 것으로 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