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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중국은 시진핑 집권 이후 소위 중국몽의 실현을 위해 야심적인 글로벌 일대일로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중국의 이런 정책은 이곳저곳에서 중국의 구시대적이고 때늦은 제국주의 정책으로 판명되면서 범세계적 반중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신(新)중화제국은 오랫동안 대한민국을 속국으로 포섭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한 결과 마침내 이재명 정권의 중국으로의 편승을 달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재명 정권의 중국으로의 편승은 국민적 합의를 얻지 못한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의 일방적인 정책일 뿐이다. 이런 상황은 햄릿의 독백을 상기시킨다.
"세상은 이제 막 시작하려는데… 옛것은 잊혀지고 관습은 모르겠고."
지정학적으로 말해서, 대한민국은 독립 후 줄곧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해양세력의 대(對)전체주의적 유라시아 대륙을 향한 교두보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 결과는 자유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을 통한 대한민국의 선진국지위 달성과 국민들의 풍요로운 삶이었다. 이제 이재명 정권은 70년간 유지된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중공을 중심으로 아시아-태평양 해양세력에 대항하여 신(新)중화제국을 보호하는 완충지대로 전락시키려 한다. 그 결과는 정치적 일당독재와 경제적 빈곤의 재앙을 초래할 것이 뻔하다. 그러므로 이재명 정권의 정책은 강력한 국내적 역풍을 일으키고 패권국 미국의 대응 조치로 조만간 실패할 것이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21세기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지정학적 역할에서 미국과의 한층 강화되고 업그레이드된 동맹관계를 가져올 것이며 그에 따라 대한민국에 조국통일을 위한 새로운 역사적 기회가 발생할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의 결과는 20세기 한반도의 남북한 70년간의 실험에서 명백하고 뚜렷하게 입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런 현실을 인정하고 깨닫지 못하고 종북과 친중에 젖어 있는 것은 아마도 그들은 레이몽 아롱(Raymond Aron)이 지적한 공산주의라는 '이념의 아편쟁이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혼란 속에서도 마치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곰처럼 새로운 자유민주주의 지도자가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천재 정치가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에 의하면 국가 정책의 성공은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올바른 기회를 포착하는 데 달려 있다. 그런 타이밍의 포착은 유명 도덕가의 덕목이 아니라 예리한 전략가의 자질이다. 군주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고결한 도덕가가 아니라 고도의 전략가다. 동양의 최고 스승이었던 공자는 등용을 위해 천하를 주유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손자나 제갈공명 같은 전략가는 군주의 부름을 받아 전략가로서 명성을 역사에 남겼다. 기회의 창은 모든 사람들에게 언제나 열려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이 열릴 때 예리하게 포착하는 것은 역사에서 흔하지 않다. '그렇고 그런' 보통의 정치 지도자들은 기회의 창이 열렸을 때 올바른 타이밍에 무심하거나 아예 그런 기회를 의식하지도 못한다.
국제정치는 참으로 복잡하다. 그러므로 그것을 이해하려고 현실을 단순화해야만 하는 것이 국제정치 이론의 본질이다. 그러나 국제정치학은 '정밀과학'이 아니라 '가능성의 기술'이다. 정치 행동에서 진실로 합리적이고 성공적이기 위해서 정치가에게는 과학도와 다른 종류의 지식이 필요하다. 그것은 과학도의 확실한 사실들의 지식이 아니라 사회적 세계에서 움직이는 영구적 법칙에 관한 철학적 지식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열쇠는 과학이 추론하는 사실들에 있지 않다. 그것은 과학적인 것을 뛰어넘는 인간이 자신의 경험을 인간 본성의 보편적 법칙으로 승화시키는 철학적 통찰과 지혜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연히 열린 기회의 창이나 올바른 타이밍의 포착도, 지도자가 추구하는 정치적 목적에 따라 개인과 국가의 운명을 판이하게 가를 것이다. 20세기 레닌, 무솔리니, 그리고 히틀러와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경우 그들의 기회 포착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하는 정치적 목적의 비도덕성으로 인해 인류에 커다란 해악을 끼치고 말았다. 그러나 윈스턴 처칠과 샤를 드골과 같은 정치 지도자들은 기회의 포착에 성공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치적 목적이 인류 문명의 구원이나 조국의 해방과 같은 숭고한 것이었기에 그들은 지금도 역사에서 인류의 영웅이요 스승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현실은 역사학과 역사학자들의 몫이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이 서술하는 역사는 현재 정치적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수많은 상이한 해석에 직면한다. 역사학자들도 역사적 사건들의 유사성과 차별성에 관하여 선호가 다르다. 예를 들어, 미국의 베트남 개입을 옹호했던 사람들은 뮌헨과 히틀러의 유추(analogy)로 추론했다면, 개입 정책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고대 아테네인들의 시칠리 원정이나 로마제국의 멸망을 가져온 사건들의 유추로 추론했다. 몽테뉴(Montaigne)의 지적처럼 어떤 사건도 다른 사건과 전적으로 같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사건도 다른 사건과 전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것은 자연의 교묘한 혼합물이다. 만일 우리 인간들의 얼굴에 유사성이 없다면 우리는 인간과 금수를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다른 점이 없다면 우리는 서로를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유추에 의한 추론은 인간 사고(思考)의 본질이다. 그러나 소위 '역사적 교훈'은 전혀 분명하지가 않으며 사람들은 종종 특정 역사적 경험에서 얻은 올바른 교훈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뿐만 아니라 올바른 역사적 교훈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과거와 다른 새로운 상황에 그런 교훈들을 잘못 적용하기도 한다. 역사철학자들도 그러한 카테고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니체는 헤겔과 마르크스를 비판했었다. 역사의 상이한 해석과 빈번한 인용의 심각한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손(Christopher Thorne)은 역사의 신(Clio)을 콜걸에 비유했다. 그녀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모두가 나름대로 완전하게 생각해 낸 자기만의 핑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정치가들이 '역사의 심판'에 호소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역사의 심판을 들추는 사람들은 자신의 외침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문제를 회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인간 생존의 불안전이 인간의 지혜에 도전하는 바로 그곳에 숙명과 자유, 그리고 필연과 우연의 상봉점이 있다. 승리의 보장도 없는 자신에게 불리한 여건 속에서 인간은 과학적 진리의 추구자가 되기보다는 영웅처럼 투쟁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가의 영감(inspiration)은 언제나 자신이 속해 있는 거대한 조직에 의해서 부과되는 제약에 의해 시험을 받는다. 즉, 그는 자신의 정책에 대한 국내적 지지를 획득할 필요성을 안고 있다. 지도자의 영감과 조직 간의 이 갈등은 인간 역사의 피할 수 없는 요소다. 영감은 위대성을 요구하지만 조직은 평범함이 리더십의 보편적 유형이라고 고집을 부린다. 따라서 리더십에 있어서 조직과 영감을 구별하는 것, 즉 관료적 요구와 리더십의 요구를 구별하는 것은 철학과 윤리의 과제다. 국제적으로 생각하는 지도자에게 외교정책의 구조적 문제는 모든 관련 국가의 상대적 안정, 그리고 그들의 상대적 불안정을 보장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즉, 정치 지도자는 자국의 능력과 의도 사이에 균형을 잡아야 하나 그는 타국의 선의에 의존할 수 없다. 그것은 곧 외교정책의 포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헤겔의 지적처럼 어떤 정치가는 자신의 영감으로 역사의 숙명적 교차로에 선다. 그리고 자기의 비전과 용기 있는 행동으로 불멸의 명예를 획득했다. 인간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나 혹은 자신이 성취하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짊어지는 과업에 의해서 신화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외교의 경이로운 마법사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는 정치가가 미래의 비전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자신이 국민에게 직접 전달할 수 없고 또 그 비전의 진실성을 확인해 보일 수 없는 고전적 드라마의 주인공에 비유했다. 국가들은 경험을 통해서만 배운다. 그런데 국가들은 행동하기에 너무 늦어버렸을 때에만 깨닫게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위대한 정치가는 자신의 직감이 이미 경험인 것처럼, 즉 자신의 영감이 이미 진리인 것처럼 행동해야만 한다. 정치가의 이런 도덕적 딜레마는 시간을 초월하려는 노력과 그 시간 속에서 생존할 필요성에 기인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위대한 정치가는 종종 예언자의 운명을 공유한다. 그는 자국 내에서 명예를 얻지 못하고 그의 위대성은 보통 자신의 직감이 국민적 경험이 되어버린 후 오직 회고적으로만 분명하게 된다. 따라서 정치가는 국민적 교육자가 돼야만 한다. 즉 그는 국민들의 경험과 자신의 지혜 사이에, 국가의 전통과 미래 사이에 가교를 세워야만 한다.
따라서 외교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은 물리적 자원의 문제라기보다는 외교정책의 목적과 철학적 인식의 문제다. 현명한 외교정책은 위험이 급박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결코 아니다. 외교정책의 창조적 사고는 우리 시대의 근본적 패러독스를 간파하는 것이다. 창조성을 위한 상당한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에는 외교정책적 도전에 관한 사실들이 모호하고 불확실하기 쉽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두 알게 되었을 때에는 종종 행동하기에 너무 늦어버린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 복잡한 상호의존적 세계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국가의 지도자들이 안고 있는 딜레마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정치적 리더십의 비결 중 하나는 자신이 취할 역사적 행동의 적절한 타이밍의 포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재명 정권의 대(對)중국 편승정책의 실패는 한반도에 역사적 대전환의 창을 열 것이다. 대한민국은 그동안 대(對)북핵 정책에 있어서 수차례 절호의 타이밍을 흘려보내지는 않았을까? 돌이켜 보면 가장 중대한 실수는 1994년 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이라고 할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평생 반공주의자를 자처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갑자기 민족주의자로 변신하여 민족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다고 주장하면서 대북 유화정책을 선택했다. 그는 미국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핵시설 폭격을 단호히 막았다. 그는 북한 핵문제의 근원적 해결의 기회를 망쳐버렸다. 그후 김대중 정부는 오히려 햇볕정책이라며 북한을 경제적으로 도왔다. 노무현 정부가 포용정책을 내세워 북한을 계속해서 돕자, 김정일 폭군은 2006년 마침내 핵실험을 단행했다. 그러자 노무현 정부는 북한의 핵무장을 오히려 옹호하고 나섰다. 그 후 북한은 핵실험을 거듭했으며 우리는 북한의 핵 공포를 껴안고 전전긍긍하며 살아왔다. 그 후 이명박 정부는 북한의 무력도발에도 불구하고 현상유지 정책에 매달렸고 박근혜 정부에 와서야 북한 김정은의 참수작전을 계획했지만 실천할 타이밍을 놓쳤고 오히려 박 대통령은 탄핵되어 정권이 좌파세력으로 넘어갔다. 그 후 문재인 정권은 북한에 완전히 패배주의적 굴종정책을 유지했다. 그사이에 대북정책에서 적절한 대북 공세정책의 기회에 대한 개념조차 깡그리 상실해 버렸다. 그 후 간신히 권력을 회복했던 우파의 윤석열 정부는 안일한 반공정책과 좌파의 척결에 게으름을 피우다가 좌파세력에 의해 오히려 되치기당해 정권을 상실했다. 대한민국은 좌파세력의 심연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러나 이재명 정권의 어리석은 반미정책과 중국 편승정책의 강력한 역풍은 오히려 미국과의 실질적 동맹 강화를 업그레이드하고 대한민국에 조국통일의 절호의 기회를 가져다줄지도 모른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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