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올해의 작가상 수상자는 무명입니다’, 웃음으로 다시 쓰는 오스카 와일드의 존재론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ww2.asiatoday.co.kr/kn/view.php?key=20251021010007451

글자크기

닫기

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10. 21. 18:00

명성과 망각 사이에 선 예술가, 스테이지블룸이 유쾌한 코미디로 되묻는 삶의 의미
K-드라마식 시트콤과 젠더프리 캐스팅, 와일드의 세계를 오늘의 무대로 불러내다
01
연극 '올해의 작가상 수상자는 무명입니다' 출연진 컨셉 이미지. / 사진 스테이지 블룸
세기의 예술가 오스카 와일드가 다시 무대 위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번에 그가 서 있는 자리는 화려한 명성의 정점이 아니라, 내면의 균열과 혼돈이 교차하는 벼랑 끝이다. 극단 스테이지블룸의 신작 '올해의 작가상 수상자는 무명입니다'는 찬란했던 천재의 몰락을 유쾌한 코미디 형식으로 재구성하며, "삶의 마지막 순간, 당신이 남기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22일부터 11월 2일까지 극장 동국에서 공연되며, 제8회 '극장 동국 연출가전' 참가작으로 무대에 오른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19세기 영국 문학을 대표하는 오스카 와일드가 있다. 한때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으로 '올해의 작가상'을 거머쥐며 세상을 뒤흔든 그는, 이후 잇따른 실패와 비극적 사랑의 상실을 겪으며 나락으로 떨어진다. 한때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그는 더 이상 누구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한다. 작품 속 와일드는 재기를 꿈꾸며 다시 펜을 들지만, 원고는 5년째 단 세 문장에서 멈춰 있다. 그리고 공모 마감까지 단 한 달이 남은 시점, 그는 마지막 희망처럼 '뮤즈가 산다'는 기묘한 집으로 향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를 맞이한 것은 영감이 아니라, 조현병적 망상과 환시가 만들어낸 환영들이다.

죽은 연인 살로메, 천재 작가 헨리, 보조 작가 도리안, 그리고 '캔터빌의 유령'에서 이름을 빌려온 캔터빌. 여기에 날카로운 비판을 쏟아내는 비평가들이 더해지며, 와일드의 정신세계는 점점 혼돈으로 빠져든다. 그에게 이 인물들은 모두 현실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그의 내면에서 생성된 허상이다. 현실과 망상이 교차하는 이 설정은 관객으로 하여금 와일드의 내면을 함께 여행하도록 만든다. 그의 혼란과 불안, 그리고 창작의 강박이 코믹한 장면 전환 속에서 드러나며, 예술가가 마주한 '창조와 파괴의 경계'가 흥미롭게 표현된다.

극단 스테이지블룸은 이번 작품을 통해 와일드의 고뇌를 단순한 비극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웃음'을 매개로 그가 겪는 붕괴의 순간들을 포착한다. 작품은 K-드라마를 연상시키는 삼각관계 구조와 시트콤적 리듬을 활용해 무거운 주제를 유쾌하게 전환한다. 와일드가 살로메와 나누는 애틋한 멜로, 도리안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경쟁과 동경, 그리고 캔터빌과의 유머러스한 대화까지. 이 다양한 관계의 조합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리게 하면서도 인간적인 감정의 층위를 정교하게 쌓아 올린다. 웃음 뒤에 남는 묵직한 여운은 결국 인간이 스스로를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무대의 배경이 되는 '뮤즈하우스'는 예술가가 영감을 찾아 들어온 집이자, 그가 자신과 가장 깊이 마주하는 내면의 공간이다. 와일드는 이곳에서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 현실과 환영 사이를 오가며 자신이 만들어낸 인물들과 대화한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작품의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와일드의 소설 속 캐릭터들에서 파생되었으며, 관객은 그가 그들과 싸우고 화해하며 자신을 다시 써 내려가는 과정을 목격하게 된다. 현실 인물로 보이는 이들조차 모두 그의 창작 속 산물이라는 설정은, 예술가의 창작과 존재의 경계를 탐구하려는 극단의 의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03
연극 '올해의 작가상 수상자는 무명입니다' 출연진 컨셉 이미지. / 사진 스테이지 블룸
'올해의 작가상 수상자는 무명입니다'의 또 하나의 특징은 젠더프리 캐스팅이다. 와일드 역은 배우 서준교, 안현진, 한아임이 번갈아 무대에 올라 각기 다른 해석을 보여준다. 살로메 역에도 최승규와 최지은이 함께 출연해 인물 관계의 감정선을 다층적으로 구현한다. 성별의 구분을 넘어 감정의 본질에 집중한 이 구성은 와일드와 살로메의 관계를 보다 입체적으로 확장하며, 사랑과 창작, 인간 내면의 복잡한 결을 새로운 시선으로 조명한다. 관객은 성별을 초월한 연기를 통해 예술가가 느낀 사랑과 상실의 감정을 보편적 차원에서 공감하게 된다.

작품은 웃음과 슬픔이 공존하는 순간을 통해 와일드라는 인물의 경계를 그려낸다. 코미디와 멜로, 판타지와 철학극의 요소가 한 무대 안에서 충돌하고 섞이며, 관객은 웃음 속에서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마주한다. 스테이지블룸은 '유머'를 인간을 이해하는 언어로 활용해, 무겁지 않게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와일드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그려내는 동시에, 그가 추구했던 예술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를 묻는 것이다. 작품은 "삶의 마지막 순간, 무엇이 나를 증명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중심에 두고, 예술과 사랑, 기억의 의미를 탐색한다.

와일드는 명성을 잃고 이름마저 버리지만, 그가 끝내 두려워한 것은 '망각'이었다. 작품은 그가 환영과 싸우며 도달하는 깨달음을 통해,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작품이 아니라 사랑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의 기억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러한 결론은 와일드의 실제 삶과 맞닿은 듯하면서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확장된다. 결국 '무명'은 단지 이름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타인의 평가에서 벗어나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찾는 자유의 상징으로 읽힌다.

이번 공연은 극단 스테이지블룸이 제작하고 극장 동국이 주최·주관하며, 김병화가 극작과 연출을 맡았다. 출연은 서준교, 안현진, 한아임, 최승규, 최지은, 고기웅, 남지은, 손윤지, 온정현, 임수민, 장유민, 전서림, 최지인, 현세이 배우 등 총 14명이 참여한다.

'올해의 작가상 수상자는 무명입니다'는 제목 그대로 '무명'이라는 단어를 새롭게 묻는다. 세상의 평가가 아닌, 살아 있음의 증거로서 예술과 기억, 사랑을 이야기한다. 코미디는 결국 사유로, 웃음은 성찰로 이어진다. 공연이 끝난 뒤 객석에 남는 것은 허무가 아니라 살아 있음의 감각이다. 와일드는 묻는다. "당신은 무엇으로 존재를 증명할 것인가." 그 물음은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것이다.

02
전형찬 선임 기자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