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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의 비극을 외면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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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10. 21. 08:00

인천 실화에서 출발한 사회탐사극, 고립과 무관심의 시대를 무대 위로 불러내다
이새로미 작·박혜선 연출 ‘양심이 있다면’, 잊힌 이웃의 목소리로 ‘우리’의 감각을 되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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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양심이 있다면' 출연진 컨셉 이미지. /사진 극단 사개탐사
한 노모가 자수했다. 아들을 죽였다고. 그러나 그 집의 세입자들은 그녀에게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다가구주택의 얇은 벽 너머로 함께 밥을 먹고 인사를 나눴지만, 아무도 서로의 삶에 진심으로 닿지 못했다. 연극 '양심이 있다면'은 바로 그 무관심의 틈에서 시작된다. 고립된 은둔 중년의 죽음과 남겨진 가족의 붕괴, 그리고 그 사건을 둘러싼 주변인들의 침묵을 통해 작품은 오늘의 우리에게 되묻는다. "양심이 있다면, 우리는 이 비극 앞에서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이새로미 작, 박혜선 연출의 '양심이 있다면'(극단 사개탐사)은 제10회 여성연극제 '작가전' 선정작으로 오는 23일부터 26일까지 서울예술창작센터 내 서울씨어터 202 무대에 오른다. 2025년 희곡 공모 우수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인천에서 실제 발생한 '은둔 중년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 노모의 자백, 그리고 백골이 되어 발견된 은둔 딸의 사례는 모두 '고립된 개인'이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사라져간 사건이었다. 작품은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외면해온 '이웃의 부재'를 무대 위로 되살린다.

작품은 흔히 청년세대의 문제로만 여겨지던 '은둔과 고립'을 중·노년층의 현실로까지 확장한다. 박혜선 연출은 "고립과 은둔은 청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 변화 속에서 중·노년층도 도태와 낙오라는 이름으로 배제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번 무대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치부된 고립이 어떻게 사회 전체의 균열로 번져가는지를 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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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양심이 있다면' 무대를 준비하는 배우들의 연습 현장 / 사진 극단 사개탐사
무대는 세 구역으로 나뉜다. 공유주방을 중심으로 다가구주택, 골목, 또 다른 집의 풍경이 겹쳐지며, 각기 다른 질감의 소리가 관객을 감싼다. 생활음과 대화, 그리고 침묵이 중첩되는 가운데, 무대 전체는 차갑고도 낯익은 현실의 공기를 만들어낸다.

이 공간 안에서 배우들은 각자의 일상을 살아가는 인물로 분해되어 서로의 목소리를 만든다. 이한희, 정소영, 이지영, 최명경, 강현우, 최광, 김현수, 전소현, 김용선, 이재희, 권남희, 변은영은 세입자와 이웃, 권사와 가족 등 서로 다른 관계 속 인물로 등장해, 고립된 인간의 내면과 무심한 사회의 표정을 동시에 드러낸다. 겹쳐진 공간과 얽힌 삶들이 교차할수록 작품은 점점 더 현실에 가까워진다.

그렇게 쌓인 소리와 움직임의 층위는 결국 한 문장으로 수렴된다. "우리는 과연 소통하고 있는가." 박혜선 연출이 관객에게 던지는 이 질문은 무대의 음향적 구조를 통해 더욱 직접적으로 다가온다.

이새로미 작가는 작품의 첫 탈고 당시 "관객이 소리에 짓눌리길 바랐다"고 회상한다. 대학원에서 표현주의 연극을 연구하던 그는 "듣기 싫은 소리로 가득 찬 무대를 만들면 관객이 이야기 자체에 집중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하지만 연출과 논의하며, 결국 문제는 '듣기 싫은 소리'가 아니라 '이웃의 소리를 듣지 않는 태도'임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무대화를 "혼돈 속에서 작품의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고 덧붙였다.

'양심이 있다면'의 프롤로그에는 성경 디모데전서 1장 19절 구절이 등장한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작가는 이 구절을 통해 한 노모의 삶을 비춘다. 아들이 집에 틀어박혀 놀고 있을 때도, 어머니는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 그녀는 지키고자 했던 양심까지 버리게 된다. 작가는 "권사님(극 중 노모)은 끝까지 선한 양심으로 아들을 돕고자 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 믿음이 부서지는 순간, 양심을 버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순차였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처럼 작품은 종교적 은유와 사회적 리얼리즘을 교차시킨다. 신앙과 도덕, 사랑과 죄책감, 친절과 보답의 경계가 흐려진 인간 군상을 통해, 도덕적 판단의 잣대가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드러낸다. 이웃의 죽음에 무감각한 사회, 타인의 불행을 외면하는 인간의 냉담함이 무대 위에서 점차 벌거벗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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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양심이 있다면' 출연진 컨셉 이미지. /사진 극단 사개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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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양심이 있다면' 출연진 컨셉 이미지. /사진 극단 사개탐사
극단 사개탐사는 이름처럼 '사회를 탐사하는' 창작집단이다. 가정폭력, 이민자 고립, 이기적 민족주의 등 사회의 모순을 무대화해온 단체로, 이번 작품에서도 현실의 이면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이들은 비극의 중심에 풍자적 캐릭터를 배치해 무거운 주제 속에서도 관객이 일상의 부조리를 웃음 섞인 시선으로 마주하게 한다.

이새로미 작가는 "대한민국이 위기를 극복해 온 힘은 '우리'라는 문화적 단결성에 있었다"며 "이웃의 소리가 다시금 '우리'의 이야기로 들리길 바란다"고 전한다. 그는 'K-컬처'가 세계로 확장되는 지금, 정작 우리 사회 안에서는 공동체의 감각이 희미해지는 현실을 우려한다. "'우리'라는 단어는 대한민국에만 존재하는 표현이다. 이웃을 사촌이라 부르던 따뜻한 문화가 다시 회복되길 바란다"고 작가는 강조했다.

박혜선 연출 역시 이번 작품을 통해 '양심'이라는 단어를 재정의한다. "양심이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감각일지도 모른다." 그의 말처럼, '양심이 있다면'은 도덕적 훈계가 아니라 감각의 회복을 요구하는 작품이다.

이번 공연은 한국여성연극협회가 주최하는 제10회 '여성연극제'의 '작가전' 섹션으로 선보인다. 2013년 '한국여성극작가전'으로 시작해 2021년 현재의 이름으로 확장된 이 연극제는 작가, 연출가, 배우, 디자이너 등 다양한 여성 예술인들이 참여해 인간성 회복과 평등한 양성문화를 추구하는 축제다.

올해는 '연출가전'의 극단 초인 '낙월도'(천승세 작, 이상희 연출)를 비롯해 프로젝트 한민규의 '말, 하지 않더라도', 에이치프로젝트의 '서찰을 전하는 아이', 씨어터 백의 '더 클래스' 등 총 다섯 작품이 무대에 오른다.

이외에도 한국 무대미술의 거장 신선희 무대디자이너의 강연과 제1세대 여성극작가 박현숙·김자림 탄생 100주년 기념 세미나, 시민이 참여하는 독백대회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이어진다. 10주년을 맞은 올해, 여성 창작자들이 던지는 질문은 명확하다. '인간의 회복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연극 '양심이 있다면'은 단지 한 사건의 재현이 아니다. 소통의 실패가 만들어낸 고립의 풍경 속에서, 인간의 온도와 공동체의 가능성을 되묻는 작품이다. 관객은 다층적인 소리와 빛의 질감 속에서 '이웃의 부재'를 체험하게 된다. 작품은 비극을 전시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외면해온 감정의 잔향을 조용히 남긴다. 이새로미 작가가 말했듯, "이웃의 소리가 당신의 귀에 궁금한 그들의 이야기로 들리길 바란다." 그 바람처럼, 이 작품은 우리가 잃어버린 '우리'의 언어를 되찾는 무대다.

포스터
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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