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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세계 제국의 형성, 역사의 발전인가, 퇴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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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10. 19. 17:47

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58회>
송재윤
송재윤 맥마스터대 역사학과 교수
◇제국의 출현, 인류사의 분기점

전국 시대의 분열과 대립을 종식한 진·한 제국은 향후 2000년 넘는 세월 동안 중화 제국의 모태가 되었다. 진·한 제국이 없었다면 오늘날 중국은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유럽처럼 수십 개 나라로 갈라져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1949년 성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은 청 제국의 주요 영토를 대부분 차지했고, 정부 조직 면에서도 중앙집권적 행정조직을 이어갔다.
진시황(秦始皇)이 최초로 도입한 통일 제국의 시스템이 현대 중국에까지 면면히 이어졌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오늘날 중국이 한 덩어리의 거대한 국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진·한 시기를 거치면서 제국의 질서가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최초로 제국을 건설한 진시황은 중국사를 통틀어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킨 정치 혁명가였다. 마오쩌둥은 늘 스스로 진시황보다 더 위대하다고 말하려 했지만, 그 역시 진시황의 현대적 현현에 불과하다.

히스파니아, 갈리아, 브리타니아, 라인강 서부의 게르마니아, 이탈리아반도, 발칸반도, 소아시아 및 중동 동부, 북아프리카 등 지중해 세계 여러 지역을 한데 아우른 로마제국은 오늘날 유럽연합의 역사적 모태였음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로마제국이 없었다면 유럽은 아직도 수십 개 민족국가들로 조각나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

물론 유럽연합은 로마제국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로마제국은 군사 정벌로 영토를 확장하고 군대를 주둔시킨 후 황제의 권위를 내세워 강제력으로 지배했던 반면, 유럽연합은 회원국 모두가 동의한 조약과 자발적 협상 위에서 결성되어, 그 자체로 민주적 정통성을 갖는다. 이러한 차이점에도 유럽연합의 기원은 로마제국으로 소급된다. 로마제국은 영국에서 중동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하나의 행정 구역으로 통합하여 공동의 법제와 문화를 확산했다. 로마제국의 도로망, 동전, 기독교 신앙 등은 유럽의 통합을 촉진했으며,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로마가톨릭, 로마법, 라틴어는 유럽의 공동 유산으로 유지됐다. 유럽이라는 문화적·지역적 관념 자체가 로마제국에서 기원했다.

고대 로마의 정치·경제 중심지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 유적지
고대 로마의 정치·경제 중심지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 유적지. 사진/ 저자.
◇제국적 통합,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 약속

장구한 중국사는 진·한 제국의 출현 전후로 나뉜다. 유럽사 역시 로마제국의 출현 전후로 갈라진다. 그 점에서 진·한 제국과 로마제국의 형성은 확실히 인류사의 획기적 전기였다. 그러하기에 2000여 년 전 동서양에 비슷한 시기에 들어선 제국의 질서가 현대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신석기 혁명 이래 지구인의 문명사는 제국 출현 전후로 양분된다. 제국의 출현 이후 인류는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다양한 종족들이 지역적 한계와 관습의 차이를 넘어 서로 만나고, 얽히고, 뒤섞이면서 더 다채롭고, 풍부하고, 개방적인 문화를 일궈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제국적 질서가 확립되면서 인류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카이사르가 죽고 나서 아우구스투스 시대가 열리면서 로마는 실질적 제국으로 발돋움했다. 그 후로 200여 년 동안 팍스 로마나라 불리는 전대미문의 풍요로운 시기가 펼쳐졌다. 중국 역시 진시황이 죽고 나서 한 제국이 들어선 후로 중화 대륙에도 태평성세(太平聖世)가 열렸다. 팍스 로마나와 태평성세는 지역 맹주들이 전쟁을 벌이던 시기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장기적 평화와 번영의 시기였다.

그렇게 제국사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후 미도가 물었다.

"제국적 통합이 이뤄지면, 원거리 교역이 활발해지고, 전국적 시장이 출현해서 지역별로 특산품을 생산하게 되지요. 경제학에서 말하는 경제적 특화입니다. 그 결과 생산 총량이 급증합니다. 제국적 통합은 정치적 안정과 함께 경제적 번영을 불러옵니다. 그렇게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지구인은 왜 그토록 제국의 역사를 폄훼할까요?"

중국의 만리장성(萬里長城)
인류사 최대 건축물로 꼽히는 중국의 만리장성(萬里長城). 나무위키.
진·한 제국이나 로마제국이나 정복 전쟁으로 건설된 대규모 군사 제국(military empire)이었다. 전쟁으로 일어선 군사 제국이 팍스 로마나와 한 제국의 태평성세를 열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순 없다. 광활한 대륙의 여러 지역에서 무장 세력이 나타나면 다대다(多對多)의 무력 충돌을 피할 수가 없다. 역사학에선 그런 시기를 '전국(戰國) 시대'라 부른다. 군웅(群雄)이 할거(割據)하는 전국 시대엔 다자간의 느슨한 평화 조약 따위는 의미가 없다. 전쟁은 더 큰 전쟁을 부르고, 전쟁을 통한 지역적 병합은 강성 대국의 출현을 불러온다. 전국 시대의 종식을 위해선 통일 제국을 건설하는 길밖엔 없다. 고대 중국과 로마에선 실제로 통일 제국이 출현했고, 제국 건설 후엔 장기적 평화가 상당 기간 지속됐다.

통합된 제국의 질서는 정치적 안정, 경제적 번영, 문화적 융성, 문명의 고도화 등 수많은 장점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지구인들 다수는 아직도 '제국'이란 단어에 즉각적 거부반응을 보인다. 신대륙 발견 이후 강력한 군대를 앞세운 서구 열강이 세계 시장 개척을 위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앞다퉈 식민지를 건설하고 조직적 수탈을 이어갔다는 반제국주의적 역사 인식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전통 시대 제국의 연장

중화인민공화국의 헌법 서언(序言) 둘째 문단에는 유구한 역사 전통을 자랑하던 중국은 1840년 이후 반(半)봉건·반(半)식민지로 전락했다는 문구가 나온다. 여기서 1840년은 의심의 여지 없이 제1차 아편전쟁(1839~1842)을 가리킨다. 1840년이란 특정 연도가 등장하는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거대 서사(grand narrative)가 깔려 있다.

중남미 은광에서 채굴한 다량의 은을 필리핀 마닐라로 옮겨 와서 중국의 차, 비단, 도자기를 구매하던 서구 열강은 이후 만성적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에 밀매하는 사악한 방편을 썼다. 특히 동인도 회사는 청 제국의 국부를 침탈하기 위해 중국의 선량한 인민을 아편쟁이로 만든 사악한 대영제국의 갱 조직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 사악한 상술에 넘어가 중독자로 전락한 중국 인민은 아편굴에서 파이프를 물고서 국부를 맹독성 연기와 맞바꿔버려야만 했다.

제국주의 서사는 중화 민족주의의 이념적 기반이다. 서구 제국주의에 맞선 중국 인민의 투쟁이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가능하게 했다는 주장이다. 문제는 오늘날 중국이 바로 지난 2000여 년에 걸쳐 전개된 제국적 군사 정벌의 결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중국 헌법은 2200여 년에 걸친 중화 제국의 역사는 제국주의가 아니라 '봉건주의'라 규정한다. 중국공산당이 제국주의란 개념을 근세 이후 서구 열강의 침략에만 한정한다. 중화 민족주의를 강화하기 위함일 뿐이다. 그런 식의 구분법이 학술적으로 엄밀할 순 없다. 2000년 이상 지속된 중화 제국은 지구인의 세계사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최장기 지속된 고전적 의미의 제국이었다. 근세 서양 제국은 악으로 여기면서 고대 중화 제국은 선이라 한다면, 자문화 중심의 이중잣대이며 개념적 자기모순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은 2000년 중화 제국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송재윤 캐나다 맥마스터대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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