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술은 이미 앞서가지만, 제도와 규제는 여전히 '허용이냐 금지냐'의 낡은 논쟁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중요한 질문은 "쓸 것이냐 말 것이냐"가 아니다. 어떻게 설계할것인가이다. 무작정 도입하면 은행의 예금 기반이 흔들리고 통화정책의 힘은 무뎌질 수 있다. 그러나 제대로 설계하면 한국은 아시아의 결제 허브로 도약할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이 각광받는 이유는 명확하다. 카드나 국제 은행망 같은 기존 결제 방식이 비싸고 느리며 영업시간에 제약을 받는 반면, 스테이블코인은 저비용·즉시성·24시간 운영을 동시에 제공한다. 특히 국가별 결제망이 단절되는 국경 구간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이 중립적 결제자산으로 기능한다. 해외 근로자 송금, 국제 전자상거래, 관광객 결제처럼 우리와 밀접한 영역에서 이미 효용이 입증되고 있다.
하지만 기회만큼 위험도 크다. 스테이블코인은 은행이 아니다. 예금보험도, 중앙은행의 최종대출자(backstop)도 없다. 평상시에는 1대1 준비자산으로 안정적이지만, 위기 시 대규모 환매 요구가 몰리면 '암묵적 뱅크런'(시장 신뢰가 무너져 대량 환매가 동시 발생하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2023년 미국 실리콘밸리은행 사태 때 USDC가 일시적으로 달러 가치를 잃었던 사건은 이를 잘 보여준다. 한국은 특히 은행 중심 금융중개 구조, 단기 국채 시장의 협소함, 외화·원화 이중 구조라는 취약한 지점을 안고 있다. 준비자산을 어떻게 구성할지, 환매 요구가 몰릴 때 어떤 방어 장치를 둘지, 금융기관 간 역할을 어떻게 나눌지 지금 정하지 않으면 위험이 기회를 앞설 수 있다.
따라서 규제의 원칙도 달라져야 한다. 기존 규제처럼 거래가 끝난 뒤 적발하는 방식으로는 부족하다. 초당 수천 건이 오가고 흔적을 지우는 기술이 난무하는 환경에서는 사후 규제로 범죄를 막을 수 없다. 규제는 거래 순간에 작동해야 한다. 이른바 '설계 단계 규제 (Compliance-by-Design)' 접근이다. 규정을 코드 속에 내장해 송금 버튼이 눌리면 스마트컨트랙트(smart contract, 자동으로 조건을 실행하는 블록체인 기반 계약 코드)가 위험 패턴을 탐지한다. 의심 거래는 지연되거나 자동으로 보고가 생성되고, 필요할 경우에만 법적 절차를 거쳐 신원이 열리게 된다. 영지식증명 같은 기술을 활용하면 사용자가 합법적 신원임을 증명하면서도 개인정보는 끝까지 보호된다. 합법 사용자는 편리함과 프라이버시를 동시에 누리고, 범죄성 거래만 실시간으로 걸러진다. 이런 구조가 시장 신뢰를 만든다. 규정을 지키면서도 부드럽게 돈이 흐른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스테이블코인이 본격적인 금융 인프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한국은 중앙은행 디지털화폐, 원화 스테이블코인,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각자의 역할을 분담하고 상호 연동하는 삼중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국내 결제 안정성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국제 연결은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최종적 신뢰는 CBDC가 담당하는 그림이다. 이렇게 세 겹으로 쌓고 상호 운용성을 확보한다면 금융안정과 혁신을 동시에 잡을 수 있다. 준비자산은 현금성·초단기 채권 중심으로 두고, 발행사 파산 시에도 보유자가 권리를 지킬 수 있도록 파산격리 구조와 보유자 우선권을 법으로 보장해야 한다. 환매는 평시·혼잡·비상 단계로 나눠 규칙을 코드화해 위기 때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사람이 유리해지는 구조를 차단해야 한다.
스테이블코인의 도입은 전면적 확대보다 효과가 뚜렷한 분야부터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외국인 관광객의 QR 결제처럼 소비자가 체감하는 영역, K-콘텐츠·역직구 등 소액·반복 결제가 많은 전자상거래, 그리고 글로벌 프리랜서 비용 지급과 같은 국경 간 노동 시장이 우선 대상이다. 이 세 분야는 파급력이 크면서도 규제 리스크가 낮아, 단계적 신뢰 형성과 제도 확산의 출발점으로 적합하다. 소비자는 편리함을, 기업은 비용 절감을, 당국은 통제 가능성을 확인해야 제도적 확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