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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을 응시한 연극, 무대에 남은 질문들… 제46회 서울연극제 폐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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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7. 13. 08:59

연극의 윤리성과 동시대성 조명한 무대들
‘관저의 100시간’ 대상 수상
‘장소’와 ‘원칙’은 우수상, 자유경연 대상은 ‘에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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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관저의 100시간' 공연 장면. 재난 속에서도 결정을 유보하는 정치인과 관료들의 무기력한 회의가 무대 위에 펼쳐진다. 무대 위 고발과 침묵이 교차하는 이 장면은, 연극의 윤리적 시선을 그대로 드러낸다. / 사진 네버엔딩플레이
아시아투데이 전형찬 선임 기자 = 봄의 설렘과 여름의 열기를 함께 품었던 제46회 서울연극제가, 7월 10일 오후 서울연극창작센터 라운지에서 폐막식을 열고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연(緣), 극으로 잇다'를 슬로건으로 내건 이번 축제는 공식선정작, 자유경연, 해외초청작, 전시와 단막극 등 70여 편의 프로그램을 통해 연극의 확장성과 사회성을 탐구했다. 특히 올해 연극제는 현실과 호흡하는 예술로서의 연극에 주목하며, 동시대 관객에게 깊은 질문을 던졌다.

공식선정작 부문 대상은 네버엔딩플레이의 '관저의 100시간'에게 돌아갔다.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재난 대응의 무능과 국가 시스템의 실패를 집요하게 추적하며, 연극의 윤리적 가능성을 증명했다. 총리 관저의 무력한 회의실, 피난민 커플, 축산 농가, 구조 현장 등 다양한 공간이 무대 위에 병렬적으로 펼쳐지며, "책임이란 무엇인가", "결정은 누가 내리는가"라는 질문을 끝까지 붙든다.

'관저의 100시간'은 실존 재난을 연극 언어로 치환한 작품이다. 무대는 정치자금 스캔들에 휘말린 총리가 위기를 모면하려 하던 와중, 예기치 않은 대지진이 발생하면서 급격히 전환된다. 무능한 회의와 책임 회피, 반복되는 "확인 중입니다"라는 말들은 국가 시스템의 기능 상실을 낱낱이 드러낸다.

연극은 총리 관저를 넘어 피난 현장, 축산 농가, 동성 커플의 갈등 등으로 무대를 확장하며, 재난이 다양한 삶의 층위에서 어떻게 감당되는지를 병렬적으로 구성한다. 정교한 리얼리즘 대신 잔상과 언어의 파편으로 재난을 형상화한 이 작품은, 침묵과 중첩된 동작을 통해 관객의 감각을 일깨운다. 배우들은 개별 인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시스템 안에서 기능하는 존재로 그려지며, 무대는 그 구조적 무기력을 끝내 증언한다.

"우리는 다 살지 못했다. 그러나 모두 죽지도 않았다. 우리는 남았다." 이 문장은 재난이 지나간 자리에 무엇이 남는지를 묻는 선언이자, 이 연극이 도달하고자 한 궁극의 방향을 암시한다. '관저의 100시간'은 '그때'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의 경고이며, '다음'을 살아갈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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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회 서울연극제 공식선정작 대상을 수상한 '관저의 100시간' 팀이 폐막식 후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배우 오세혁 연출(중앙)을 비롯한 창작진과 출연진의 환한 웃음 속에, 100시간의 연극적 응시가 담겨 있다. / 사진 서울연극제
우수상은 극단 불의전차의 '장소'와 극단 배다의 '원칙'이 수상했다. '장소'는 1989년 일본 오사카의 조선고급학교를 배경으로, 자이니치 청소년들의 정체성과 공동체 내부의 긴장을 조명한 작품이다. 학교라는 '장소' 안에서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작동하던 규범과, 그 안에서 점점 작아지는 개인의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한 이 연극은 특정 민족 서사를 넘어 보편적인 청춘의 기억으로 확장된다.

'장소'의 주인공 '현장소'는 조선학교의 신입생이다. 강한 위계와 규율, 민족 공동체라는 이름 아래 작동하는 질서 속에서 그는 '싸움'이라는 통과의례를 통해 정체성을 요구받지만, 그 과정에서 점차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된다. 민족기악부실의 가야금 소리, 운동장에서 벌어지는 몸싸움, 교문 앞 충돌은 단지 풍경이 아니라 기억의 층으로 무대에 중첩되며, 사라져가는 장소의 감각을 복원해낸다.

이 작품은 자이니치 출신 작가의 청춘기를 바탕으로 쓰였으며, 민족적 서사이면서 동시에 보편적 성장 서사로 기능한다. "나는 누구로 남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관객에게 조용히 던져지며, 연극이 소환한 '장소'의 본질을 정면에서 마주하게 한다.

'원칙'은 평범한 학교라는 공간을 통해 사회의 권위 구조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새로 부임한 교장이 제정한 새로운 규율은 자율적 문화를 지켜온 교감과 충돌하고, 교사와 학생 모두가 긴장과 분열 속에 놓인다. 이 연극은 '좋은 교육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지키는 규칙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홍콩 극작가 궈융캉의 희곡을 한국 교육 현실에 맞게 각색한 이번 무대는, 단순한 권력 대립을 넘어 교육이라는 공공 시스템의 정당성과 균형을 탐색한다. 각 인물은 입장이 아닌 질문으로 존재하며, 관객은 그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한 채 극장을 나서게 된다.

강정구 역의 오용 배우는 복합적인 리더십을 절제된 언어로 표현하며 연기상을, 양준 역의 김현진 배우는 억눌린 내면과 저항의 감정을 섬세하게 구축해 신인연기상을 수상했다. 기술 스태프 역시 절제된 무대와 감정 중심의 구성을 통해 극의 리듬을 효과적으로 뒷받침했다. '원칙'은 구조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묻는 연극이며, 그 질문을 무대 위에 끝까지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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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회 서울연극제 폐막식 현장. 공식선정작, 자유경연 부문 참여 팀들과 연극제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61일간의 여정을 함께 마무리했다. 서울연극창작센터 라운지에서. / 사진 서울연극제
그 외에도 연기상은 '산재일기'의 공지수·신윤지, '카르타고'의 유독현, 그리고 '장소' 출연진에게 돌아갔다. 신인연기상은 '카르타고'의 조수연에게도 수여됐다. 무대예술상은 '관저의 100시간'의 남경식(무대), '은의 밤'의 박혜림(조명)이 수상하며, 극의 완성도를 높인 기술진의 성과도 함께 조명됐다.

자유경연 부문에서는 극단 이야기가 선보인 '에라, 모르겠다'가 대상을 수상하며, 차기 연극제의 공식선정작으로 초청됐다. 정상성에 대한 발칙한 질문을 던진 이 작품은 관객과 평단의 지지를 동시에 받았다. 베스트 5에는 극단 파수꾼의 '돌고 돌고', 혈우의 '방패맨', 혜화살롱의 '순례네 국밥', 달팽이주파수의 '산난기', 다이얼로거의 '모로코로 가다'가 선정됐다. 관객리뷰단이 선정한 '베스트 오브 관객상'은 극단 무아지경의 '죽음과 소녀'에게 돌아갔다.

자유경연 연출상은 '순례네 국밥'의 김진아와 '에라, 모르겠다'의 최재성이 공동 수상했으며, 희곡상은 '산난기'의 송천영 작가가 수상했다. 연기상은 '덕만씨를 찾습니다'의 승의열, '그대는 봄'의 류지애·박무영·한혜수가 공동 수상자로 선정됐다.

한편 폐막식에서는 서울 연극계에 오랜 시간 헌신해온 극단들의 노고를 기리는 특별공로상 시상도 이어졌다. 창단 60주년을 맞은 극단 가교, 40주년의 극단 가가의회, 30주년의 극단 느낌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제46회 서울연극제는 연극이 단지 공연 예술을 넘어, 사회를 관찰하고 기록하며 질문을 던지는 집단적 사유의 장이 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올해 무대는 전례 없는 위기, 교육과 규범, 정체성과 기억 등 다양한 사회적 맥락을 치열하게 건드렸다. 연극은 해답을 주기보다 질문을 남겼다.

그 질문은 다시 관객에게 돌아가, 삶과 사회, 공동체 안에서 이어질 것이다. 연극은 끝났지만, 연극이 남긴 감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무대 밖 우리의 삶 속에서.
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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