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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과 감각의 경계에서, 료지 이케다를 다시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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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7. 13. 10:57

ACC 개관 10주년 기념 전시, 세계적 사운드 아티스트 료지 이케다의 신작 포함 7점 공개
데이터·빛·소리로 구성된 몰입형 시청각 실험… 존재와 인식에 대한 철학적 사유 이끌어
포스터
아시아투데이 전형찬 선임 기자 =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이 개관 10주년을 맞아 세계적인 사운드 아티스트 료지 이케다(Ryoji Ikeda, 1966~)를 다시 초청한다. 오는 7월 10일부터 12월 28일까지 ACC 복합전시관 3·4관에서 개최되는 '2025 ACC 포커스 - 료지 이케다'는 기술과 예술, 데이터와 감각, 인간과 세계를 둘러싼 예술적 탐구의 축적을 선보이는 기념비적 전시다. ACC가 창제작 중심 융·복합 예술기관으로 내디뎠던 첫걸음의 기억을 되새기며, 앞으로의 10년을 사유하는 이 전시는 예술과 기술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료지 이케다는 ACC 개관 첫 해인 2015년, 기관의 융·복합 창제작 프로젝트에 참여해 강렬한 설치작품 'test pattern [n°8]'을 선보이며 한국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작품은 각종 텍스트, 영상, 이미지 데이터를 초당 수백 프레임의 흑백 패턴으로 압축·변환한 시청각 경험으로, 당시 11m에 이르는 스크린과 16개의 스피커, DLP 프로젝터로 구성된 거대한 시스템을 통해 기술과 감각, 인식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전시로 회자되었다. 이후 이케다는 2023년 ACC의 ACT(Arts & Creative Technology) 페스티벌에도 참여해 오디오 비주얼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등 ACC와 긴밀한 협업을 이어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신작 4점을 포함해 총 7점의 작품이 소개된다. 특히 작가의 대표적 연작과 최신 실험을 동시에 선보임으로써, 기술의 언어가 예술로 전이되는 지점을 포착하고, 데이터 시대에 예술이 갖는 감각적·철학적 의미를 재조명한다. 전시의 시작은 천장에 설치된 10미터 길이의 LED 스크린으로 구성된 작품 'data.flux [n˚2]'(2025)로 열린다. 인체의 DNA 데이터를 기반으로 기하학적인 패턴이 시시각각 흘러가는 이 설치는, 데이터의 무한성과 인간 인지의 유한성을 극적으로 대비시키며 관객을 몰입시킨다. 정보의 흐름을 따라가려는 감각은 결국 한계에 부딪히고, 이케다는 그 인지적 좌절 자체를 하나의 미학적 경험으로 환원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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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data.flux [n˚1]'(2020), 180 Strand 전시 전경 / 사진: Jack Hems
'point of no return'(2018)은 블랙홀의 '사건 지평선(event horizon)'이라는 개념을 기반으로 제작된 설치작이다. 완벽한 원형의 암흑과 이를 둘러싼 빛의 강렬한 대비는, 단순한 시각적 대비를 넘어 물리적 경계와 존재론적 한계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프로젝터와 조명이 만들어낸 이 인공적인 우주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정보와 세계를 대면했을 때 느끼는 무력함을 시각적으로 상기시킨다. 정보의 과잉과 감각의 혼란이 지배하는 시대, 이케다는 관객의 앞에 절대적인 경계의 형상을 제시하며, 기술의 빛이 만들어낸 어둠의 깊이를 응시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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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point of no return'(2018), 히로사키 현대미술관 전시 전경 / 사진: Takeshi Asano
대표작 중 하나인 'data-verse 1/2/3'(2019?2020)은 NASA, CERN, 인간 게놈 프로젝트 등에서 수집된 방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상 3부작이다. 각각의 영상은 미세한 분자 단위부터 거대한 은하계까지의 정보를 시각적으로 배열하고, 고주파 사운드와 함께 압도적인 시청각 경험을 제공한다. 세 개의 스크린은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의 질서를 담고 있으며, 이번 전시에서는 총 40미터에 이르는 벽면에 투사되어 단일 시야 안에서 세계의 다양한 차원이 동시에 펼쳐지는 독특한 구조로 구성된다. 이케다는 데이터를 단순한 정보가 아닌 감각을 열어주는 재료로 다루며, 물리학적 세계의 구조를 예술적 언어로 치환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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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data-verse 1/2/3'(2019?2020), 코펜하겐 현대미술관 전시 전경 / 사진: David Stjernholm
'exp #1'(2020)은 바닥 위를 달리는 붉은 레이저의 궤적으로 구성된 작업이다. 정교하게 계산된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기하학적 패턴은, 어둠 속에서 가상의 공간을 떠올리게 한다. 레이저라는 비물질적 빛의 재료가 물질적인 공간감과 질서를 만들며, 관객은 자신이 인식하고 있는 공간의 범주를 다시 사유하게 된다. 이는 단지 시각적 경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술적 조작과 감각의 작용이 결합된 하나의 체험으로 확장되며, 존재가 무엇을 통해 구성되는지를 질문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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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exp #1'(2021), 180 Strand 전시 전경 / 사진: Jack Hems
새롭게 선보이는 'data.gram [n˚8]'(2025)은 이케다의 대표 연작인 'data-verse'에서 사용된 데이터를 18개의 화면으로 분할해 재조합한 작업이다. 데이터 배열의 변주를 통해 정보가 어떻게 해석되는지를 실험하며, 각기 다른 시퀀스의 흐름과 시각적 조합이 새로운 감각을 형성한다. 이 작업은 우리가 마주하는 정보가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그 조합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을 생산한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케다는 데이터 자체보다 그것을 '보는 방식'에 주목하며, 관객이 정보 환경 속에서 의미를 구성하는 능동적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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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data.gram [n˚8]'(2023), Amos Rex 전시 전경 / 사진: Tuomas Uusheimo
이번 전시는 단순한 작가 회고가 아닌, ACC가 지난 10년간 이어온 융·복합 창제작 실험의 집약이자 확장이다. 관객을 위한 몰입적 관람 환경 조성에도 힘썼다. 쉬운 글 해설이 포함된 디지털 가이드와 온라인 활동 프로그램을 통해 누구나 작품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으며, ESG 실천의 일환으로 1,000개의 재활용 모듈형 벽체를 활용해 전시 공간 자체를 친환경적으로 설계했다. 관객은 데이터의 흐름, 빛의 움직임, 음향의 떨림 속에서 자신의 감각과 인식을 되묻는 경험을 하게 된다.

료지 이케다는 1966년 일본 기후 시 출생으로, 1990년대 백색 소음과 순음을 결합한 전자 음악 실험으로 예술 활동을 시작했다. 1996년 아방가르드 그룹 '덤 타입(Dumb Type)'과의 협업을 계기로 오디오 비주얼 퍼포먼스와 설치로 영역을 확장했으며, 독자적인 알고리즘과 실시간 렌더링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데이터 미학을 시각예술로 구체화시킨 작가로 평가받는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퐁피두 센터(2018), ZKM(2015), 에스토니아 국립박물관(2024), 하이 뮤지엄(2025) 등이 있으며, 일본 문부과학성 예술 신예 작가상, 프릭스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어워드, ZKM 기가-헤르츠 어워드 등 다수의 수상 경력을 갖고 있다.

김상욱 ACC 전당장은 "기술과 데이터가 주도하는 시대 속에서 예술이 인간의 감각과 사고, 존재를 어떻게 비추는지를 성찰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며, "이번 전시가 ACC와 료지 이케다의 10년이 교차하는 순간이자, 앞으로의 예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함께 고민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데이터가 시(詩)가 되고, 빛이 사유가 되는 이 전시에서 관객은 다시금 묻게 된다. 기술로 가득 찬 이 시대에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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