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영명학교, 충남 독립운동가의 산실
우리암, 우광복 등 선교사 일가가 보인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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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과 함께 최근에 방문한 충남 논산 병촌성결교회는 대표적인 순교자 교회였다. 6.25 한국전쟁 당시 66명의 순교자가 나온 병촌성결교회는 단일교회에서 두 번째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곳이다. 이 때문에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 교단의 순교사적지 1호로 지정됐으며, 이를 기리는 '66인 순교 기념탑'과 안보기념관이 조성돼 있다.
이성영 병촌성결교회 담임목사는 "당시 북한군은 기독교 정신이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의 통치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고,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 4살 이하 어린이라도 가차 없이 학살했다"며 "66명의 순교자는 죽음의 순간까지 끝내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순교의 현장은 한국 최고의 침례교 예배지였던 강경침례교회에서 찾을 수 있었다. 미국 침례교회에서 파송된 폴링(1864~1960) 선교사가 포목상인 지병석 집사와 만나 1896년 강경 옥녀봉에서 예배드린 'ㄱ' 형태의 예배당이 강경침례교회의 시작이다. 이후 강경침례교회는 점차 성장했으나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거세지면서 위기를 맞는다. 1943년 5월 일제는 신사참배 거부를 이유로 강경침례교회의 재정과 재산을 몰수했으면 교회가 소유한 4151평의 땅을 강경 신사 재산으로 소유권을 이전한다.
옥녀봉 인근 강경성결교회 또한 일제의 신사참배에 저항한 교회였다. 1918년 10월 성결교단에서 파송한 정달성 전도사가 한옥 2칸을 빌려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된 이 교회는 신사참배 거부 및 일본 역사 교육 거부 사건을 주도했다.
허은철 총신대 교수는 "일제는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제국주의 우상에 저항하는 기독교가 껄끄러웠다"며 "이에 대해 초기 선교사들은 일제의 만행에 대한 진상을 파악해 전 세계에 만방에 알리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설명했다.
선교사의 교육이 독립운동과 얼마나 밀접한지 드러내는 곳은 공주 영명학교다. 프랭크 윌리엄스 선교사가 1906년에 세운 이 학교는 유관순 열사, 황인석 교장, 조병옥 박사 등 충남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공주기독교박물관으로 탈바꿈한 공주제일교회 구 예배당에서는 유 열사의 어린 시절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한국명 사애리시로 유명한 앨리스 해먼드 샤프 선교사는 유 열사의 첫 스승으로 그를 서울 이화학당 장학생으로 편입시킨 주역이다. 공주에서 선교를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남편을 전염병으로 잃은 사애리시는 이후 39년간 한국에 머물며 20여개 여학교를 설립한 여성 교육의 어머니다.
학교 뒤편 영면동산에 있는 남편 묘비와 나란히 서 있는 사애리시 묘비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우리가 당한 고난이 크고 잃은 것이 많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든 선한 길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암(禹利岩)이라는 한국 이름을 쓴 윌리엄스(1883~1962)는 1906년 10월 공주영명학교를 설립하고 30여년간 교장으로 근무했다. 아내인 앨리스 선교사는 같은 학교에서 수학과 음악을 가르치며 인재 육성에 함께 공헌했다. 윌리엄스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몸 바치는 애국자 등을 교육 목표로 삼았다.
여양현 공주영명중·고등학교 교장은 광복 8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날도 재학생들이 선배들의 독립운동을 자랑스럽게 여기도 있다며 "우리 학교 출신자 17명이 국가보훈부에 등록된 독립유공자"라고 말했다.
영명동산에는 윌리엄스 부부의 아들과 딸의 묘가 남아 있다. 이들은 한국에서 다섯 자녀를 낳았는데 이 가운데 장남 조지 윌리엄스(1907∼1994)와 딸 올리브(1909∼1917)가 이곳에 잠든 것이다. 장남의 한국 이름을 우광복(禹光福)으로 지은 것에서 윌리엄스 부부의 철학을 유추할 수 있다.
서만철 한국선교유적연구회 회장은 "(그의) 아버지·어머니는 조선이 빨리 일본에서 독립하라는 의미를 담아서 광복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라며 "다만 우광복의 복자를 '회복할 복'(復) 대신 '복 복'(福)으로 쓴 것은 조선 독립을 염원한다는 의도가 일제에 바로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선택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부모의 바람대로 우광복은 자유 대한민국의 건국과 번영에 큰 역할을 한다. 광복 후 미군정기에 군의관으로 한국에 파견됐다가 군정사령관 존 하지(1893∼1963)의 통역으로 활동했다. 그는 미군정과 한국인 엘리트 그룹을 연결하는 가교 구실을 했으며 이념 대립이 치열하던 정국에서 자유민주주의 진영이 세력을 형성하는 데 적잖은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여동생 곁으로 보내달라는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 일부는 영명동산에 모셔졌다.
김종혁 한교총 대표회장은 "기독교 신앙은 단순한 개인의 믿음에 머물지 않고, 한국 사회의 교육·의료·독립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깊은 영향을 미쳤다"며 "우리가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을 깊이 새기고 소중히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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