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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 문서와 일본 언론 보도에 따르면, 1994년 2월 11일(현지시간) 미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당시 일본 총리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에서, 동석한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은 북한의 핵개발 문제를 설명하면서 "북한이 완강한 태도를 바꾸지 않고 IAEA의 보장조치(사찰)를 수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며 "한반도에서 '컨틴전시(contingency·불측 사태)'를 상정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미국은 영변 핵시설 공습을 포함한 군사옵션까지 검토한 것으로 알려져, 북·미 간 긴장이 고조된 시점이었다.
이에 대해 호소카와 총리는 "일본은 국내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가능한 한 책임 있는 대응을 취하겠다"며 한국, 중국과도 협력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돼 있다. 호소카와 총리는 요미우리신문 인터뷰에서 "미국은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지만 일본 정부는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회고하며 "'컨틴전시'라는 단어가 나오면서 정부 차원의 대응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말했다.
호소카와 총리는 같은 미국 방문 기간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였던 밥 돌 의원도 면담했다. 돌 의원이 "북한의 이웃인 일본이 걱정하지 않는데 왜 미국이 걱정해야 하는가"라고 지적하자, 호소카와 총리는 자위대의 직접 관여는 "어렵다"고 설명하는 한편 "미군에 대한 지원은 제대로 실시하겠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하타 쓰토무(羽田孜) 외무상은 윌리엄 페리 미 국방장관과 회담하고 "만일 긴급사태가 발생하더라도 미·일 간 연계를 조밀하게 해 어떠한 사태에도 대응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귀국 후 호소카와 총리는 '불측의 사태'에 대비한 정부 차원의 대응책 검토를 지시했다. 당시 외무성에서 위기관리 계획 수립을 담당했던 다나카 히토시(田中均) 전 외무심의관은 일본 언론에 "미군 지원과 일본인 보호 조치를 검토했지만 일본 법체계에 중대한 결함이 있어 중요한 국면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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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산케이신문은 외무성이 이날 함께 공개한 문서에서, 호소카와 총리가 클린턴 대통령과의 회담 이후 유사 대응을 위한 본격 검토에 착수하는 한편, 위기 대응 능력 강화를 위해 내각 개조까지 검토했지만 연립 파트너였던 일본사회당(현 사회민주당)의 반발 등으로 실행되지 못했다고 전했다. 호소카와 내각은 결국 1994년 4월 사임으로 단명 정권에 그쳤고, 이후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내각으로 정권이 넘어갔다.
일본 정부는 당시 북한과 전통적인 우호 관계를 맺고 있던 중국에도 역할을 요청했다. 외교문서에 따르면 호소카와 총리는 1994년 3월 방중해 리펑(李鵬) 중국 국무원 총리와 회담하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대북 제재 결의로 발전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리펑 총리는 핵확산에 반대한다는 원칙을 밝히면서도 "중국은 친구로서 국제사회의 사고방식을 전할 수 있을 뿐"이라며 압력과 제재에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고, 북한의 핵개발 능력에 대해서도 "자금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그 능력은 없다"는 견해를 나타낸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일본 언론은 이번 외교문서 공개로, 1993년 3월 북한의 NPT 탈퇴 선언과 IAEA 특별사찰 거부로 촉발된 1차 북핵위기가 일본 안보정책 전환의 직접적인 계기였다는 점이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됐다고 평가했다. 1994년 10월 미국과 북한이 영변 원자로 동결과 경수로 제공 등을 골자로 한 이른바 '제네바 합의(Agreed Framework)'에 도달하면서 위기는 일단락됐지만, 일본 내에서는 "유사에 대응할 수 없는 법제 공백"에 대한 위기감이 이후 1990년대 후반 안보법제 논의의 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