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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푸틴이 깡그리 망각한 제1차 세계대전의 역사적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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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3. 10. 04. 18:18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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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역사는 되풀이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되풀이한다." 17세기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볼테르(Voltaire)의 말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 러시아가 개입한 즉각적인 이유는 1914년 7월 위기 때 차르와 그의 장군들이 내린 결정에 있었다. 2022년 2월에 발생한 우크라이나-러시아 간의 전쟁의 즉각적인 이유도 현대판 차르인 푸틴과 그의 장군들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특별군사작전이라는 미명하에 내린 기습침략이라는 결정에 있었다. 그 결과 지금까지 1년 반 이상 지속되고 있는 전쟁에서 푸틴 대통령의 졸렬한 전쟁수행은 차르 니콜라스 2세의 비극적 운명을 되풀이할 것처럼 보인다.

1914년 8월 1일 소위 "8월의 대포소리"로 제1차 세계대전(당시엔 그냥 대(大)전쟁으로 불림)이 시작했을 때 러시아에서는 "어머니 러시아(Mother Russia)"에 대한 애국주의와 "작은 아버지(Little Father)"라고 불리던 차르 니콜라스 2세에 대한 사랑이 지배적인 국민적 감정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현실이 본국에 미치자 그런 감정은 아주 신속하게 사라져버렸다. 8월 말 러시아의 군대가 독일의 힌덴부르크(Hidenburg) 장군에게 타넨부르크(Tannenburg) 전투에서 간단히 패배했다. 러시아인들은 서부전선에 있는 독일군을 끌어내기 위해 동(東)프러시아를 대담하게 침공했다. 그러나 프랑스를 돕다가 러시아는 25만명의 병사들과 많은 장비를 잃었다. 그리고 독일 군대들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점령하고 러시아의 영토로 진격했다. 1915년 말까지 그들은(독일군들은) 러시아 내부로까지 침입했고 병사들의 손실은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1915년 말에만 러시아의 사상자는 400만명을 넘어섰다. 부상병을 치료할 병원과 간병과 약과 의료시설이 크게 부족했다. 철도망은 병사들과 보급품의 수송을 감당할 수 없었으며 러시아의 산업은 독일의 산업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

러시아의 군대들은 효율적으로 지휘되지 못했고 무장과 의복과 식량이 적절하게 공급되지 않았다. 병사들의 소요는 러시아 인민 전체의 삶에 스며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전투에서 잃은 가족과 친척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다. 차르가 1915년 9월에 군의 지휘권을 직접 맡으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는 군사전략적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 따라서 이것은 앞으로 전투의 패배들이 필연적으로 모두 그의 책임이 될 것임을 의미했다. 1916년에 들어 파업과 항의가 증가했고 이에 대한 정부의 금지는 별로 효과가 없었다. 더욱 불길하게도 무장병사들 사이에서 시도된 반란사건들은 차르와 그의 보좌진들에게 혁명이 다가왔음을 경고했지만 그것들을 진압할 효율적인 병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경고들을 무시하고 1917년 3월 7일 수도 페트로그라드를 떠나 전선으로 향했다.

바로 다음 날인 3월 8일 빵의 부족으로 다시 한번 노동자들이 항의하기 위해 페트로그라드의 거리에 나섰다. 3월 10일 토요일까지 25만이 넘는 파업노동자들이 수도의 거리에서 데모를 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차르와 그의 정부의 타도를 외쳤다. 상황은 곧바로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3월 12일 월요일 데모꾼들은 공공건물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고 경찰서와 군(軍)막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페트로그라드에 있는 소수의 군부대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병사들은 군중들에게 발포하기를 거부했고 대신에 어떤 병사들은 그들의 장교들에게 총을 쏘았다. 같은 날 차르는 의회(the Duma)를 해산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의원들은 이것을 거부하고 자유주의적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페트로그라드의 다른 곳에서는 소련 노동자들과 군인들의 대표자들이 구성되었다. 임시정부는 알렉산더 케렌스키(Alexander Kerensky)라는 젊은 변호사에 의해 주도되었다. 약 3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러시아의 로마노프(Romanov) 왕가가 마지막 차르 니콜라스 2세의 퇴위로 마침내 비극적 종말을 맞았다. 3월 16일 새로 선출된 의회의 첫 조치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노동자들과 군인들의 대표들과 합의한 여러 가지 조치들을 발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대한 문제는 역시 전쟁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2월 혁명 시 소요의 배경이었다. 케렌스키는 여름에 전쟁장관이 되어 남부 폴란드의 갈리시아(Galicia)에서 공세를 취할 계획을 세웠다. 처음엔 몇 차례 승리가 있었지만 그러나 곧 패배로 바뀌어 수천 명의 러시아 군인들이 도피하거나 군대를 이탈했다. 1917년 4월 레닌(Lenin)과 많은 다른 볼셰비키들이 돌아왔다. 레닌은 중립국 스위스에 있었지만 독일인들이 그에게 철도로 독일을 통과하여 러시아까지 안전한 여행을 제안했다. 독일인들은 레닌이 전쟁을 끝낼 것이라고 계산했고 그들이 옳았다. 그리하여 독일인들은 레닌을 돕는 일에 가능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레닌은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그는 즉시 볼셰비키 혁명의 때가 도달했다고 발표했다. 레닌은 임시정부와 어떤 협력도 즉시 배제하고 정권의 타도를 요구했다. 레닌은 러시아 군인들은 평화를 원하고, 러시아 농민들은 땅을 원하고, 그리고 산업노동자들은 온당한 임금과 식량과 빵의 적합한 공급을 원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평화, 땅, 그리고 빵이라는 슬로건으로 그들 모두를 만족시켰다.

7월에 레닌과 트로츠키(Trotsky)는 임시정부에 대항하는 폭동을 일으키려고 시도했지만 그것은 시기상조였다. 폭동 자체가 형편없이 조직되었다. 폭동 시도는 실패했고 트로츠키를 포함하는 많은 볼셰비크들이 투옥되었지만 레닌은 재수 좋게 핀란드로 탈출했다. 케렌스키는 수상이 되어 전쟁을 계속하는 전 정부의 정책을 지속했다. 레닌, 트로츠키 그리고 볼셰비크들은 이제 공격하여 정부를 장악하기로 결정했다. 11월 7일 수요일 그들은 이번에는 잘 조직된 상태에서 그래서 사실상 무혈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그것은 대부분 트로츠키가 세운 계획이었다. 권력을 장악한 레닌의 즉각적인 과제는 그가 러시아인들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는 것이었다.

레닌은 11얼 8일 토지의 사적 소유권을 아무런 보상도 없이 폐지하였다. 후에 인민들에게 경작권을 주었지만 모든 토지는 국가의 소유였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공장들의 운명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다. 레닌은 빵도 약속했다. 그러나 이것은 지키기가 어려웠다. 식량부족은 그 후 몇 년 동안 무서운 기근으로 이어졌다. 레닌은 내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전시공산주의(the War Communism) 정책을 도입했다. 그러나 그것은 농민들을 어렵게 만들어 그들이 군대와 마을에 사는 러시아 노동자들이 필요로 하는 잉여 옥수수 생산을 막았다.

그러나 레닌은 약속한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뭔가를 할 수 있었다. 12월 15일에 독일과 휴전에 합의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독일의 영토적 요구에 동의할 수 없었다. 레닌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를 원했기에 독일의 요구를 수락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트로츠키가 이끄는 다른 사람들은 반대했다. 그러나 독일 군대들이 다시 한번 러시아에서 행군을 시작했을 때 독일의 평화조건에 대한 저항은 무너졌다.

1918년 3월 3일에 레닌의 혁명정부는 어쩔 수 없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the Treaty of Brest-Litovsk)에 서명했다. 이 조약의 조건으로 러시아는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그리고 핀란드가 모두 독립하도록 양보하게 되었다. 더욱더 마지못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독립국가의 수립에 합의해야만 했다. 또한 러시아는 전쟁의 피해에 대한 거대한 액수의 배상금을 지불하는 데 합의했다. 그 결과 러시아는 주민의 3분의1, 곡창지역인 우크라이나를 포함하여 농업용 토지의 3분의1, 그리고 러시아 중공업의 약 3분의2를 잃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은 러시아의 동맹국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독일인들은 러시아 전선으로부터 병력을 서부전선으로 보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방 측 지도자들은 볼셰비키 혁명에 반대하는 백색군대(the White Army)에 병력과 보급품을 보냈다. 그들은 차르의 장군들에 의해 지휘됐지만 트로츠키가 새로 조직한 붉은 군대(the Red Army)에게 패배했다. 100만명이 넘는 러시아인들이 내전에서 죽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잔인하게 그리고 냉혹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혁명이 구원되었다. 이제 러시아는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으며 1922년 공식적으로 소련사회주의 연방 공화국(USSR)이 되었다. 레닌정부는 혁명을 구하기 위해 독일에게 사실상 무조건 항복과 같은 패배를 수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은 레닌의 혁명정부처럼 사실상 무조건 항복을 할 수 없다. 제1차 세계대전에 러시아의 참전은 레닌이 아니라 차르 니콜라스 2세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래서 레닌은 독일과 항복에 가까운 휴전과 일종의 평화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차르는 비극적 종말을 맞았다. 현대판 차르 푸틴은 자신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시작했기에 그런 무조건 항복에 가까운 종전을 수용할 수가 없다. 그는 차르 니콜라스 2세처럼 전쟁에 직접적이고 최종적인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푸틴이 러시아의 대통령직을 유지하는 한 승산 없는 소모전이 계속될 것이다.

유럽의 집단방어체제인 NATO, 즉 미국과 10여 개국이 넘는 유럽 국가들의 지원을 받는 우크라이나와 홀로 싸워야 하는 푸틴은 러시아의 수많은 젊은 병사들을 전쟁에 계속해서 갈아 넣고 있다. 이것은 제1차 대전에서 마치 서부전선의 경우처럼 승산 없고 그래서 러시아에겐 무의미한 전쟁이 되어버렸다. 러시아가 평화로 가는 유일한 길은 21세기 러시아의 차르 푸틴이 20세기 초 차르 니콜라스 2세처럼 강제로 퇴위를 당하거나 아니면 더 이상의 무의미한 전쟁에 반대하는 군부세력의 쿠데타에 의해서 제거되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정말로 러시아인들은 역사가 되풀이하지 않는 21세기에 100여 년 전 제1차 세계대전 때 조상들의 실패를 어리석게도 되풀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본란의 기고는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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