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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현의 文香世談] 사랑은 가도 우리는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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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6. 10. 2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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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현 (시인·교육평론가)
깊어 가는 가을, 공원의 벤치에 앉아 떨어지는 잎새를 바라본다. 오래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문득 가슴 한쪽에 묻어둔 이름이 떠오른다. 젊은 날에는 사랑도 이별도 그 순간이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떠나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지만, 그가 남긴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어느새 내 존재의 일부가 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이반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은 그런 기억에 관한 소설이다. 불혹에 가까워진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는 첫사랑 이야기를 나누다 열여섯 살 시절을 떠올린다.

그는 모스크바 근교 별장에서 스물한 살의 지나이다를 만난다. 자유분방한 그녀 주위에는 시인, 의사, 군인 등 여러 남자가 모여든다. 블라디미르는 그들 틈에서 지나이다를 바라보며 사랑에 빠진다. 열여섯 살 소년에게 사랑은 세상의 전부였다. 지나이다가 웃으면 세상이 환해지고, 다른 남자에게 관심을 보이면 절망한다. 말 한마디와 눈빛 하나에도 마음이 흔들린다. 투르게네프는 소년의 들뜸과 질투, 행복과 불안을 섬세하게 그린다. 블라디미르에게 사랑은 누군가를 이해하기보다 자신의 감정으로 세상을 채우는 일이었다.

어느 날 그는 지나이다에게 자신이 알지 못했던 세계가 있음을 깨닫는다. 청년들 앞에서 여왕처럼 군림하던 그녀가 사랑한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였다. 몰락한 가문의 불안 속에서 사랑에 모든 것을 걸었던 그녀와, 유부남이자 차갑고 오만한 성정의 아버지가 얽힌 관계였다. 아버지는 승마용 채찍으로 지나이다의 팔을 내리치지만, 지나이다는 원망 대신 피 맺힌 상처에 입을 맞춘다. 소년은 사랑 너머에 계급과 결핍, 지배와 굴종, 고통과 욕망이 얽힌 어른들의 치명적인 세계를 목격한다. 훗날 아버지는 숨을 거두기 전 아들에게 여자의 사랑과 그 행복, 그 독을 두려워하라고 당부한다.

'첫사랑'의 아름다움은 젊은 날의 사랑을 미화하는 데 있지 않다. 투르게네프는 세월이 흐른 뒤 첫사랑을 돌아보는 사람의 쓸쓸한 시선을 응시한다. 지나이다는 훗날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만 오래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비보를 전해 들은 블라디미르는 젊은 날과 그때의 사랑을 떠올린다. 그는 지난 청춘을 생각하며 "모든 것은 햇볕 속의 밀랍처럼, 눈처럼 사라져 간다"라고 탄식한다.

그러나 사라진다고 해서 삶에서 모두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떠나고 사랑은 끝나지만, 그것을 온몸으로 통과한 사람은 이전과 결코 같을 수 없다. 사랑하며 기뻐했던 기억, 상처받았던 순간, 이해하지 못했던 타인을 뒤늦게 헤아리는 경험이 내면에 남는다. 기억은 지나간 시간을 되돌려 주지 않지만, 그 시간의 의미를 새롭게 알게 해준다.

사랑은 처음에는 자기 마음의 사건으로 시작한다. 나는 왜 저 사람이 좋은가, 왜 나를 바라보지 않는가, 왜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가를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이 깊어지면 상대에게도 자신이 다 알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 그 사람에게도 지나온 시간과 상처가 있고 내가 결코 들어갈 수 없는 마음의 방이 있다. 지나이다를 바라보던 블라디미르 역시 자신의 감정에는 충실했지만, 그녀가 어떤 아픔과 파괴적인 열정을 품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사랑이란 상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 알 수 없는 부분까지도 받아들이는 일이다. 첫사랑이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은 사랑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너무 빨리 판단하며 살아간다. 몇 줄의 글과 짧은 영상만 보고 한 사람을 다 안다고 여긴다. 마음에 들면 찬사를 보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등을 돌린다. 관계도 빠르게 시작되고 쉽게 끝난다. 상대를 이해하기보다 나에게 무엇을 주는 사람인가부터 저울질한다. 사랑마저 효율과 선택의 문제가 되어가는 건조한 시대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가까이 있다고 해서 다 아는 것도 아니고, 오래 함께했다고 해서 마음속 깊은 곳까지 닿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첫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그 사람이 완벽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때의 우리는 세상을 다 알지 못했고, 마음을 아끼는 법도 몰랐다. 그래서 기쁠 때는 온전히 기뻐했고 아플 때는 온몸으로 아파했다. 투르게네프는 청춘에 대해 "슬픔조차 위로가 되고 우울조차 어울리는 때"라고 회상한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시절이기에 상처마저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힘이 있었다.

우리는 상처받지 않는 법을 배운다. 기대를 줄이고 마음을 쉽게 내어주지 않으며 관계에서도 안전한 거리를 지킨다. 그것이 어른의 지혜일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잘 보호된 마음은 아무것에도 깊이 흔들리지 않는다. 상처를 덜 받는 대신 감동도 줄어든다. 사랑뿐 아니라 책 한 권, 음악 한 곡, 한 사람의 진심 어린 말에도 마음을 내어주는 일이 어려워진다.

가을은 지나간 것을 생각하게 하는 계절이다. 회상은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때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 때문에 아파했는지를 돌아보며 지금의 마음을 살펴보는 일이다. 오래전 사랑한 사람을 다시 만날 필요는 없다. 다만 그 시절 무엇인가를 온 마음으로 좋아했던 순수한 자신까지 잊어버릴 필요는 없다.

첫사랑은 대부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오래 남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떠났지만, 그 사람을 바라보던 마음의 흔적은 우리 안에 남는다. 가을이 깊었다.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을 펼쳐보는 것은 지나간 사랑을 그리워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살아오며 마음을 내어주는 일에 인색해진 우리 안에, 아직도 무엇인가를 온전히 사랑할 힘이 남아 있는지를 묻기 위해서다.

윤일현 (시인·교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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