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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표트르의 망치, 이재명의 저녁식사, 중견국 기술외교의 시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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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6. 08. 12.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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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범 중앙대학교 국제대학원 국제정치학 박사
1697년,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신분을 감추고 네덜란드 자안담 조선소에서 망치를 들었다. 강대국 정치가 단순하고 기술 습득이 곧 국력이던 시절, 그가 배운 것은 배를 만드는 법 그 자체였다. 2026년 7월 24일, 이재명 대통령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엔비디아 CEO 젠슨 황 등 빅테크 수장들과 저녁을 함께하며 "우리는 가족"이라 선언했다. 국가지도자가 기술을 쥔 자를 찾아갔다는 본질은 같지만, 오늘날의 기술외교는 미·중 패권 경쟁이라는 복잡한 다차원 방정식 위에 놓여 있다.

이날 발표된 '샌프란시스코 AI 선언'의 핵심은 한국을 "대체불가한 글로벌 AI 공급망 핵심국가"로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행사는 백악관이 아닌 한국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최했고, 대화 상대 역시 미국 정부가 아닌 빅테크 CEO들이었다. 이미 앤트로픽은 5월 삼성전자·SK하이닉스를 핵심 파트너로 명시하며 9,650억 달러 밸류에이션의 펀딩을 마쳤고, 엔비디아와 SK 간 500억 달러대 파트너십 논의도 이전부터 지속되어 왔다. 대통령의 방문이 계약 발표의 시점과 서사를 통제하는 효과를 낸 것은 사실이나, 실상 트럼프 행정부 입장에서는 미국 주도 AI 공급망에 한국의 자본과 첨단 메모리를 확실히 결박시키는 실리를 챙긴 셈이다.

주목할 것은 이 밀착의 비대칭성이다. 한국이 메모리와 자본을 미국 생태계에 결박시키는 동안, 미국은 최첨단 프런티어 AI 모델의 해외 접근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정부가 독자 AI 모델 확보를 국가 전략과제로 격상시킨 직접적 계기가 바로 이 통제였다. 하드웨어의 공급자로는 대체불가하지만, 지능 그 자체의 수요자로는 여전히 종속적이라는 것. 이것이 '가족'이라는 수사가 가리고 있는 구조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 선언이 한국의 기술외교 포지셔닝을 어떻게 재설정(rebalancing)하고 있느냐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안미경중 구상은 2016~17년 사드(THAAD) 사태로 이미 무너졌다. 이번 선언은 미·중 모두에게 "한국을 공급망에서 잃으면 너희가 더 큰 손해"라는 인식을 심으려는 전략이며, 한국이 쥔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 점유율 80%는 중견국으로서 드물게 가지는 강력한 지렛대(leverage)다.

하지만 이 지렛대의 구조적 취약성은 선언 직후인 지난 7월 말 드러났다. 7월 28~29일, 코스피와 코스닥 시장에는 사상 최초로 이틀 연속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됐다. 물론 한국만의 독립된 악재는 아니었다. 엔비디아의 순환금융 우려와 AI 투자 지속성에 대한 회의론으로 필라델피아 반도체 지수(SOX)가 4.49% 급락하고 마이크론·AMD·인텔 등이 7~10% 폭락한 글로벌 시장 조정의 파장이었다. 문제는 코스피가 10.84% 급락하며 SOX보다 두 배 이상 크게 흔들렸다는 점이다. 반도체 편중이 심한 한국 증시의 '고베타(High-Beta)' 리스크가 여실히 증명된 순간이었다.

여기에 SK하이닉스의 컨센서스 하회와 중국 창신메모리(CXMT)의 상하이 증시 상장 첫날 465% 폭등이 겹쳤다. CXMT 상장을 중국 정부의 즉각적인 정치적 응수로 보기는 어렵다. 상장 절차에만 수개월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한국의 소버린 AI 선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흔들리는 장면이 연출되었고, 시장은 '대체불가'라는 정치적 수식어의 메타밸류(meta-value)를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재평가(repricing)했다. 한국이 미국과 밀착할 때마다 시장이 중국발 기술 자립과 리스크에 훨씬 더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다는 차가운 경고다.

중국의 자금 조달 방식이 가진 구조적 위협도 직시해야 한다. CXMT는 국가 예산을 일방적으로 쏟아부은 결과가 아니다. 국가가 키운 기업을 자본시장에 상장시켜 공모 하루 만에 12조 원이 넘는 연구개발(R&D) 실탄을 민간에서 조달하게 만든 구조다. 여기에 세계 최대 내수시장이 규모의 경제를 더한다. 결국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상대하는 것은 개별 기업이 아닌 중국이라는 국가 그 자체다. 반면 초기 5,300억 원으로 출발한 독자 AI 사업이든, 최근 잇따라 발표되는 조 단위 재정 투입 구상이든, 우리 정부의 조달은 예산 편성 주기와 정권의 임기에 묶여 있다. 문제는 액수가 아니라 속도다. 아무리 큰 숫자를 발표해도 자본시장에서 하루만에 실탄을 확보하는 구조와 경쟁할 수는 없다.

한국의 소버린 AI 전략은 화려한 선언문이 아니라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과 국익추구 사이의 균형점 위에서 완성되어야 한다. 정부가 단순한 인프라 지원자에 머물러서도 안 되지만, 한정된 국고를 무작정 쏟아붓는 것 역시 재정 여력상 불가능하다. 답은 민간과 해외 자본이 스스로 흘러들어올 매력적인 판을 제도로 설계하는 것이다. 독자 AI 사업에서 시도되는 지분투자(출자) 모델을 반도체 R&D 전반으로 확대해, 민간 자본과 국가가 리스크를 분산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정부의 실험이 비로소 시장의 조달 속도를 얻을 수 있다.

동시에 미국에는 대체 불가능한 실리를 제공하면서도, 중국과는 불필요하게 각을 세우지 않고 공급망 협력의 여지를 남겨두는 '기술외교의 유연성'이 절실하다. 과거 표트르 대제가 망치를 든 직관의 손으로 국가의 판을 바꿨다면, 이제 한국 정부는 미·중 사이에서 명분보다 실리를 챙기는 '스마트한 제도 설계의 손'을 보여주어야 한다. 샌프란시스코의 화려한 저녁식사가 끝난 지금, 진짜 시험대는 워싱턴과 베이징을 향한 정교한 외교전략과 시장의 냉정한 의구심을 해소할 지속가능한 제도 마련이다./신중범 중앙대학교 국제대학원 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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