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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좀비딸, 그리고 안티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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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9. 16. 14:36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미디어스쿨 교수
좀비딸, 좀비인데 딸이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 딸이 좀비가 되었다. 어쩔 것인가? 영화는 딜레마의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아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딸을 선택한다.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하여 국가적 붕괴위기를 맞았으나 정부의 적절한 대처로 대대적인 소탕작전은 성공한다. 이제 모든 좀비를 퇴치하였다싶은데 좀비 한 마리(?)가 바닷가 마을에 도사리고 있다. 마지막 한 마리지만 감염의 속도를 감안할 때, 또다시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런데 용케도 아빠는 좀비가 된 딸을 잘 길들인다. 아빠의 직업은 호랑이 사육사. 맹수를 다루는 전문성을 발휘해 흉측한 좀비는 서서히 딸의 면모를 되찾는다. 아빠의 딸이었음을 몸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몸에 각인된, 좋아하던 춤도 서툴지만 곧잘 추는 귀여운 좀비다. 들키지만 않으면 아무 문제없다. 모든 것은 정상이다.

일찍이 철학자 헤겔은 이러한 딜레마적 상황에 대해 논한 바 있다. 그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를 분석함으로써, 인륜으로서 친족법과 국가의 통치법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다뤘다. 테베의 왕, 늙은 오이디푸스가 자신이 금기를 깬 장본인임을 알고, 스스로 눈을 찌르고 광야로 유폐되고, 남은 테베의 통치를 누가하는가의 문제로 상속권을 가진 두 아들이 내전을 일으킨다. 형제,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는 권력을 두고 마침내 결전을 치르다가 서로 칼로 찔러 동시에 죽임을 당한다. 이제 빈 권력의 자리는 오이디푸스 왕의 처남, 즉 왕비 이오카스테의 남동생 크레온의 차지가 된다.

그런데 크레온이 직면한 문제는 폴리네이케스의 주검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로 조카딸 안티고네와 대립하게 된다. 크레온은 국법에 따라 내전에 외세를 끌어들인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황무지에 버림으로써 들짐승의 먹이가 되게 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안티고네는 오빠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땅에 묻어주다가 들키게 되고 그녀 역시 비극적 죽음을 맞는다. 죽은 가족의 시신을 예로써 장례를 치러야 하는 친족법과 통치법으로서 국법이 부딪힌 것이다.

헤겔은 보편법이 특수법에 우선하듯이 통치자로서 크레온의 수호해야 할 국법이 친족법을 우선해야 하는데, 안티고네는 공동체의 아이러니가 되었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소포클레스의 신화 속 안티고네는 가족의 시신을 거두는 것이 '신의 법'을 따르는 '인간의 법'보다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친족법이 국법에 앞서는 상위법이라는 의미다. 헤겔은 이에 대해 안티고네를 '욕망이 없는 순수한 누이'로, 한편으론 '어머니'로 표현한다. 안티고네는 남성의 질서와 대립항을 이루는 여성의 윤리로 대변된다.

한편 영화 '좀비딸'의 특별함은 의외의 것에 있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좀비가 된 딸과 아빠는 사실 부녀 관계가 아니다. 딸의 엄마와 아빠는 남매다. 이런, 이게 웬 말인가? 패륜이 아닌가 싶은데 곧 오해는 사라진다. 자신 때문에 누나가 죽었다고 자책하는 남동생은 갓난아기인 조카딸을 맡아 홀로 키운다. 아빠가 된 것이다. 진짜 아빠는 처와 아이를 버린 지 오래다. 조카는 고아나 마찬가지다. 외삼촌은 조카의 아빠를 자청한다. 이제 두 사람은 사랑과 인륜으로 매개된 새로운 가족으로 탄생한다.

이 점에서 묘하게도 영화는 안티고네 신화와 대위 된다. 안티고네의 아빠와 엄마는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다. 그들은 부부이지만 사실 모자 관계다. 그 유명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야기다. 안티고네는, 스스로 눈을 멀게 하고 유배를 선택한 오이디푸스를 따라 광야로 나선다. 안티고네의 위상은 일반적인 정체성에서 벗어나 있다. 오이디푸스의 딸이자 누이다. 동시에 권좌에 내려온 장님 오이디푸스의 수발을 드는 아내 역할을 자처한다. 오빠 폴리네이케스가 죽자, 또다시 그의 시신을 거두는 어머니의 면모를 드러낸다. 어떤 특정한 정체성에도 갇혀있지 않은 존재가 바로 안티고네다. 그녀의 선택은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서는, 공통된 정서로서 사랑과 인륜이라는 윤리를 실천하는 순수한 누이이자 어머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에 대해, 퀴어 이론으로 유명한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헤겔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안티고네를 읽는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부여된 수동적 정체성에 함몰된 존재가 아니라 '수행적 전복'의 모범으로서 안티고네를 해독한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좀비딸은 독특한 서사를 가진다. 이미 이데올로기로서 가족주의가 폐기되고 있는, 현실 정치에서 가족이란 정의를 재고할 필요가 있는 시대다. 이런 시점에서 영화는 서사를 통해 혈연이나 연민의 정서에 앞선 사랑과 연대의 정서를 끌어온다. 이로써 기어코 특정 집단을 대상화하고, 영원한 타자로서 좀비를 대하듯 증오하고 테러를 가하는 현실의 작태를 뒤틀고 비튼다.

영화를 보는 내내 웃다가, 때론 피식거리기도 하고, 끝내 울게 만드는 힘이 느껴진다. 영화 '좀비딸'이 추석 연휴까지 롱런하고 역주행하길 기대해 본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미디어스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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